자본주의는 역사에 무엇을 남겼을까?

자본주의의 위기가 논제로 떠오르고 있다. 마르크스가 엥겔스와 「공산당 선언」을 쓴 때가 1848년, 『자본론』을 쓴 때가 1867년이니까, 냉정하게 말하면, 150년 이상이나 ‘위기’를 논해 왔다는 게 된다. 왜 새삼스레 ‘자본주의의 위기’인 걸까.

■ 왜 ‘자본주의의 위기’일까.

『자본주의와 위기 – 세계 지식인들의 경고』(Markus Gabriel 외 공저, 2021년), 『왜, 탈성장인가The Case for Degrowth』(Giorgos Kallis 외 공저, 2020년), 『The Imperial Mode of Living. Everyday Life and the Ecological Crisis of Capitalism』(Ulrich Brand 외 공저, 2021년) 등 현대 자본주의 위기를 직시하고,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논고가 잇달아 출판되었다.

『자본주의와 위기 – 세계 지식인들의 경고』

왜 자본주의는 폭주할까. Markus Gabriel, Immanuel Wallerstein, Nancy Fraser Axel Honneth, John Bellamy Foster, 오코우치 다이쥬大河内 泰樹, 사이토 고헤이斎藤 幸平 등 세계의 지식인들이 욕망, 시장, 젠더, 구조적 위기, 에콜로지 등의 논점에서 위기의 원인과 극복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일본 월간지 『思想』에서 연재한 시리즈 인터뷰에 Markus Gabriel과 John Bellamy Foster의 인터뷰를 더해 만든 책이다. 오코우치 다이쥬와 사이토 고헤이는 인터뷰어로 참여.

저작들의 논점을 확인하면, 먼저 ‘자본주의의 원죄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논조를 알 수 있다.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구조적 모순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수탈’ ‘착취’ 구조를 공격하는 것이다. 대영제국의 인도, 미국 지배 등 식민지에서의 착취 위에서 자본주의가 기능하고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게다가 그것은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라, 모순을 본질적으로 내포한 시스템으로 자본주의를 파악하는 데에는 일정한 설득력이 있다. 북반구 선진국의 남반구 저개발국에 대한 수탈, 젠더 간․계급 간의 격차가 “국가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사적인 악덕(물욕)을 공적인 이익으로 전환”하는 자본주의라는 차별 시스템에 의해 초래되고 있으며, ‘탈․식민지화’(제국형 생활양식과의 결별)에 이 모순을 극복할 방향을 찾는 논의가 생겨나는 것도 납득할 수 있다.

다만, 자본주의의 본질적 모순을 단죄하는 관점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원조’를 따지게 되면,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생물의 희생 위에 성립한다고도 할 수 있으며, 그것을 억제하는 논의는 종교에 접근해 간다. 더욱이 타자와 살아가는 사회생활을 상정하면, 뭔가 ‘지배=피지배’ 구조가 묻혀 버리고, 그것은 약 1만 년 전으로 여겨지는 인류의 정주혁명 이후의 기본 구도라고도 할 수 있다. James C. Scott의 『Against the Grain : A Deep History of the Earliest States』(2017년)[『농경의 배신』, 책과함께]는, 수렵 채집 생활에서 정주․농업혁명으로의 전환을 “고대 국가에 의한 인간의 가축화(길들이기)였다고 하는 관점을 확인하고 있어, 인류 사회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의 제한 없는 성장 지향이 지구 환경을 훼손해 온 사실을 추궁하는 시각에서 제기된 개념이 ‘人新世Anthrocene’다. ‘인신세’라는 말은, 2000년에 네덜란드 화학자 Paul Jozef Crutzen이 지질학의 ‘完新世’(약 11,500년 전의 마지막 빙하기 종료에서 시작하는 지질地質 연대年代)에 비교해, 인류가 지구에서 자신의 역할․책임을 의식하고, 지구 환경에 대한 능동적 관여를 모색하는 시대라는 의미에서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런던 이코노미스트지(2011년 5월 28일자)가 ‘지질 연대의 신시대’로서 「인신세로 어서 오세요」라는 특집을 꾸몄는데, 이것이 일반에게 이 말을 인지하게 하는 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신세는 초장기적인 지질학적 시간 축에서 인류가 ‘환경 파괴와 기후 변동’을 초래했다는 시야를 여는 말로, 온난화는커녕 고온화하는 지구를 ‘연기를 토하는 혹성’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초래한 성장 지향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는 논의는, ‘탈성장’이든 ‘인신세’든, 대부분 유럽 학자가 주도하는 논의에서 발단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로운 시대의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의 구조 변혁으로 연결되는 구상을 기대하고 싶은데, 그런 차원의 논의로는 되지 않았다. 계급 모순의 극복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서 구한 20세기 사회주의의 도전이, 결국은 비민주적인 전제專制와 비효율에 의해 좌절한 것을 총괄하고, 성찰한 위에서 논의를 진행해야 하는데, 역사의 교훈이라는 허들은 높다.

그런데 이상한 일로, 현대 자본주의의 총본산인 미국에서는 구조적 자본주의 비판 논의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버드대학의 ‘인기 강의’로서, Michael Sandel의 「Justice : What's the Right Thing to Do?」가 화제가 될 정도이다. 그것도 자본주의 사회의 변혁으로 이어지는 논의가 아니라, 하버드적 양심과 그 한계를 가지고 말할 수밖에 없다. Sandel의 강의에 「아프가니스탄의 염소 사육」이라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무장 세력 탈레반에 통보할 가능성 있는 염소 사육 소년의 생명을 ‘인간적 도리’에 마음이 움직여 살려 주어 16명의 미군 병사가 죽는다는 사례를 바탕으로, 그 소년을 죽여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전면적으로 철수한 지금, 참으로 공허한 정의론이다. 애당초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진주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갈등이며, ‘정의’ 이전의 정책 과학의 문제이다. 자본주의를 구조적으로 파악하고, 개혁할 관점이 미국에서 생기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특히 냉전 후 자본주의의 핵분열로 현실에 출현한 금융자본주의의 중심인 월스트리트와 디지털자본주의의 중심인 실리콘밸리를 품고 있는 미국에서는, 자신의 생업을 부정하는 관점은 나올 수 없다.

냉전 후 자본주의의 변질 – 모순의 심화와 복잡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는 논의도, 현대 세계를 뒤덮은 문제가 그전까지 자본주의와는 다른 성격을 띠고 시작한다는 덤을 깨달아야 한다. 지난달 글에서, 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위기의 본질은, 냉전 후 세 개의 자본주의로 핵분열한 데 있다”라고 논하며, 산업자본주의를 중핵으로 해 온 자본주의가, 냉전의 종언이라는 패러다임 전환을 배경으로, 금융자본주의, 디지털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특성을 가진 자본주의를 파생시켜 복잡한 구조 변화를 이루어, 다른 차원의 자본주의로 우리를 말려들게 하는 사실을 지적했다.

새삼, 금융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해 고찰하고 싶다. 말할 것도 없이, 인류 역사와 함께 금융은 계속 존재해 왔다. 이제까지 금융의 본질은 ‘대금업’이라는 사업 실태였다. 은행 등 산업금융의 기본 기능은, 사업과 경영자를 검증, 심사해 돈을 빌려주고(융자, 투자), 그 사업이 성공해 이자, 배당이 붙어 자금을 회수한다는 구도였다. 다만, 새로운 금융자본주의는, 금융 공학을 구사한 정크본드, 헤지펀드, 고수익 채권, 가상 화폐 등 금융 파생형 상품의 다양화를 특색으로 하는 것이다. 그 성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인간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금융”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간과 인간이 마주하고 돈이 움직이는 산업금융과는 다르며, 컴퓨터 속을 돈이 돌아다니는 것이며, 생명감이 느껴지지 않는 매우 無機的인 자금 동향, 좀 더 단순화된 머니 게임이다. 이런 금융자본주의는, 금융 기능의 저류에 엉겨 있던 ‘대금업’의 죄악감(이윤에 대한 욕망의 억제)에서 완전히 해방된 금융의 등장을 의미한다.

머니 게임의 당사자와 논의하며 직감하게 되는 것은, 금융으로 돈을 버는 것에 아무런 죄악감이 없다는 점이다. 예전에 중세 유럽에서 확산된 유대인이 구약성서에서 들고나온, 이자를 취하고 돈을 빌려주는 일이 “신이 허락한 일”이라고 정당화를 도모해야 했던 스트레스는 제거되었다고 할 수 있다. pathos로서의 욕망자본주의를 제동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시대이다. ‘육성하는 자본주의’의 금융에서 ‘팔아 치우는 자본주의’의 금융으로 기본 성격이 변한 것이다.

금융의 성격이 변한 것만 아니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이 맹렬한 기세로 금융자본주의의 비대화가 진행되고 있다. 세계적인 금융 완화, 금융 규제 완화의 기조를 받아들여, 흘러넘치는 Magic Money의 은혜를 받은 사람과 버려진 사람과의 ‘격차와 빈곤’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어, 분배의 공정을 요구하는 조류를 만들어내고 있는 점은 새삼 지적할 것까지도 없다.

디지털자본주의가 냉전기에 미국 국방성에 의해 개발된 정보 통신 기술(ARPANET)의 민생 전환으로 등장한 인터넷과 극소화한 초소형 컴퓨터가 연결됨으로써 초래된 것은 이미 논했다. 그런 디지털자본주의의 기본 성격이란 뭘까? 네트워크 정보 기술 혁명이 인간의 사회생활을 효율적이고 편리한 것으로 진화시킨 것은 분명하다. 일본에서도 인구의 1.5배나 보급된 휴대용 전화, 스마트폰이 일상적으로 다양한 정보에 접속되는 수․발신 단말기로 자리를 잡았다.

자본주의는 밑바닥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경제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 요소가 변하고, 이제까지의 ‘자본, 노동력, 토지’ 등의 유형 자산에서 ‘정보․데이터’(콘텐츠, 소프트웨어, 시스템, 디자인 등)의 무형 자산이 갖는 의미가 더해지고, 그것이 디지털자본주의의 최대 특성이라고 할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 시대를 가속화하고 있다.

정보 공간에서 무료 정보 서비스가 대량의 Big Data Platform을 장악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내어, GAFAM(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으로 불리는 거대 정보 기업을 등장시켰다. 이 디지털 정보 공간에서 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은, 누구나 고르게 정보를 발신하고, 수취할 수 있는 시대를 향유하고 있다는 인식에 자주 잠기게 된다.

다만, 다시 생각하면, 디지털 정보 환경은, 인간을 ‘나는 주역이다’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위험한 환상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연일, 자기 마음대로 정보를 발신해 대통령까지 되었지만, 거꾸로 트위터의 주술에 빠진 ‘노예’라고 할 위험을 보였다. 쇼샤나 주보프Shoshana Zuboff의 『The Age of Surveillance Capitalism』(『감시 자본주의 시대』, 2021년 문학사상사)는, 디지털자본주의의 마이너스 측면을 추출하고 있으며, 전체 구조에 대한 극도의 무관심 속에서 ‘유토피아’라고 믿어 버린 둥지 속에 매몰되어 있다면, 공권력에 의한 감시와는 다른 차원에서 ‘대중을 먹이로 삼는 일종의 독재’에 끌려들어 가는 구조를 논구하고 있다.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매우 제한된 선택지 속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David Rolfe Graeber의 『Bullshit Jobs』(『불쉿 잡 - 왜 무의미한 일자리가 계속 유지되는가?』, 2021년. 민음사)는, “그 일자리, 정말 필요합니까?”라는 물음 아래, 현대 사회의 ‘일자리’의 내실을 재고하는 논의를 전개한다. 컴퓨터 개발의 기본 사상이 ‘인간의 고역, 단순 노동에서 해방’에 있다는 것을 확인해 왔는데, 디지털자본주의의 심화 속에, 인간은 정말로 창조적 노동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일까. 코로나 재난에 따른 원격 근무의 정착으로, 통근 시간에서 해방된 새로운 일하는 모양이 보이기 시작한 것도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하지만, 생겨난 시간에 무엇을 있는가, 라고 하면, 다수는 “넷플릭스를 보고 있는” 정도가 그 무엇이어서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디지털 환경을 창조적으로 살리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앱과 검색 엔진에서 정보에 계속 접근하면, 관심 있는 정보만 마주하는 시야 협착에 쉽게 빠지고, 全體知에 입각해 과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오히려 후퇴할 우려가 있다. SNS 시대를 사는 학생이나 젊은이와 논의하며 느끼는 것은, 디지털 환경이 인간 확장의 계기가 되지 않는 현실이며,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고난에 직면하는 Resilience(심적 내구력)은, 오히려 퇴화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그러니까, 새로운 자본주의의 주제란, 냉전 후 자본주의의 핵분열을 거쳐 등장한 자본주의의 주조라고 할 금융자본주의, 디지털자본주의라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無機的이고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을, 이윤 추구의 pathos만이 비대하게 되지 않도록, 어떻게 제어하는가에 있다. 經世濟民, 그러니까 국민의 행복을 고양하는 ‘건전한 자본주의’를 위한 새로운 룰 형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일본 자본주의의 나침판 - 니혼게이자이신문日本経済新聞의 역할과 책임

일본 자본주의의 나침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가 니혼게이자이신문인데, 그 원점은 종합상사 미쓰이물산의 초대 사장 마스다 다카이益田孝가 사내보로서 출발시킨 「中外物價新報」(1889년)다. 그 후, 독립해 오늘의 니혼게이자이신문으로 발전해 왔다. 나 자신, 미쓰이물산 전략연구소 회장이었던 시절, 열여섯 살의 마스다 다카이가 바쿠후幕府의 유럽 방문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프랑스를 방문한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 마르세유, 파리로 돈 적이 있는데, 스물일곱 살에 미쓰이물산 사장이 된 그가, 왜 商社 활동과 병행해 ‘경제신문’을 창간하고, 스스로 논설의 펜을 잡았던가를 알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시대 인식을 적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정보 기반을 확립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또한, 1970년대 후반, 일본경제연구센터의 에너지 전략에 관한 연구 task force에 참가해, 오데마치大手町의 니혼게이자이신문 본사에 주에 2회, 저녁 무렵부터 근무, 심야까지 열띤 논의에 계발된 추억이 있다. 재생 가능 에너지론의 효시라고도 할 수 있는 Amory B. Lovins의 「Soft Energy Paths」 등을 소재로 에너지 전략의 폭을 확대하는 논의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시야를 넓히는 소중함을 가르쳐 준 磁場이 니혼게이자이신문이었다.

그런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냉전 후라는 시대에 미디어로서 수행해 온 역할을 확인해 두고자 한다. 이 신문은 1999년 정월부터 「신·자본주의가 왔다」라는 특집 기획을 55회에 걸쳐 연재, 단행본 책으로 세상에 내놓아 평가를 구했다. 냉전 후의 시점에서 주제는, 「시장화」(시장에 맡겨라=국가의 퇴장)와 「글로벌화」(국경을 넘은 인간·상품·돈의 이동)와 「정보화」(정보 네트워크 기술 혁명 진행)에 있었다. 냉전 후 ‘신자유주의’의 도래라는 관점은 시대의 사조가 되어, 일본 경제인의 상식이 되어 갔다.

그런 시대의 사조 속에, 나 자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숙고가 담긴 논고가, 21세기 초반인 2001년 1월호 「中央公論」에 기고한 「『정의의 경제학』한 번 더」이다. 냉전 종언으로부터 10년, 나는 국제 비즈니스 현장에 있으며, 냉전기에 동 측으로 불린 구소련, 동유럽도 돌아다니며, 서 측에서 ‘상업주의와 머니 게임’이 세차게 흘러드는 것을 목격했다. 욕망이라는 자본주의의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 ‘자본주의는 이처럼 황량한 머니 게임 상황을 실현하기 위해 걸어온 것인가’라는 생각이 치밀어올랐다. 또한 미국류의 금융자본주의의 세계화를 ‘글로벌화’로 착각하고, 이상한 금융 과잉 경제가 작동하기 시작하여, ‘소득 격차’를 확대하는 상황에 대해, ‘주주 가치 최대화’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다양한 stockholder를 중시하는 자본주의 실현을 향한 ‘분배의 공정’이나 ‘새로운 공공’의 필요 등을 논하고 있었다. 내 주장은, 그 후의 ‘신·자본주의’를 떠받치는 신자유주의의 조류에 잠식된 씁쓸한 느낌은 있지만, 오늘날에도 나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자본주의가 왔다」 특집으로부터 21년, 니혼게이자이신문은 2020년 정월부터 「역경의 자본주의」를 특집으로 꾸미고,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무엇을 ‘역경의 자본주의’라는 것일까. 기획·편집자의 인식을 주목하면, ‘격차 확대’ ‘기후 변동’ ‘신형 코로나’가 역경의 의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연원에 대해 “1991년이 전기였다”라고 하며 “눈앞의 이익을 지상 명령으로 삼는 일그러진 자본주의”, “중국의 참여” “디지털화”를 오늘의 역경을 초래한 요인으로 꼽고 있다. 역시 ‘냉전 후’가 전기라는 인식이며, 자본주의가 구조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깨닫고 있다.

하지만, 요 10년 가까이, 일본의 경제·산업의 방향을 결정한 아베노믹스에는 이상할 정도로 언급하지 않는다. 상식을 깨는 금융 완화와 재정 지출을 반복하며, 디플레에서 탈각을 노린 아베노믹스라는 조정 인플레 정책이, 금융자본주의의 비대화 플랫폼을 제공하여, 일본의 경제 산업을 왜곡한 구조에 대한 경제 저널리즘의 체면에 상응한 분석도 논평도 없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정권을 배려하는 미디어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리플레 경제학’이라는 금융 정책에 과잉되게 의존한 성장 지향의 경제학에 기울어진 것은 틀림없다. “리플레 경제학이 일본 경제를 구한다”라고 하며, ‘리플레파’를 자인하는 학자들이 아베노믹스를 선도하고, 니혼게이자이신문도 거기에 동조했지만, 아베노믹스가 끝난 지금, 객관적 총괄이 요구된다. 진지하게 ‘신자유주의의 탈각’으로 향한다면, 필연적으로 아베노믹스를 엄격하게 추궁해야 한다.

2020년 5월, 니혼게이자이신문은 『NEO ECONOMY』를 간행, 디지털 기술의 진보에 초점을 맞추어, 자본주의 사회가 “형태 있는 부에서 형태 없는 부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하고 있으며, 새로운 경제 사회의 ‘풍요’가 요구된다고 하며, ‘디지털자본주의’의 도래를 특집으로 꾸미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자신이 ‘전자판’으로 비중을 옮기고, 종이 매체에서 벗어난 디지털자본주의 시대의 미디어로서 태세를 정비하고 있다. 그래서 디지털자본주의의 빛과 그림자를 주목하며, 새로운 자본주의의 공정한 제어에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경제인의 긍지란, 본질을 직시하고, 사태를 성찰하는 유연한 복원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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