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양의무자 기준 의료급여에만 아직 적용…당분간 유지될듯
정부 "2023년 3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 수립 때 논의 계획"

세종시에 홀로 사는 A(53)씨는 24살 아들이 있지만, 연락을 안 하고 떨어져 생활한 지 오래다. A씨는 간과 신장 등이 좋지 않은 만성질환으로 일을 할 수 없어 생계가 막막한 나머지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아들이 일자리를 갖기 전이어서 정부에서 생계급여와 의료급여, 주거급여 등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해치마당에서 열린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폐지 농성 선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해치마당에서 열린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폐지 농성 선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그런데 2년 전 아들이 취업하면서 주거급여만 남고 생계·의료급여가 끊겼다. 아들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서 정한 '부양의무자'에 해당하기 때문이었다.

1촌의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가 살아 있고 일정한 소득과 재산이 있다면, 국가보다 가족이 먼저 부양할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만든 것이 부양의무자다.

다행히 A씨는 지난해 10월부터 다시 생계급여는 받게 됐다. 애초 2022년 1월로 예정했던 시행 시기를 앞당겨 2021년 10월부터 저소득층에 대한 생계급여 부양의무자 기준이 폐지된 덕분이다.

하지만 A씨는 의료급여 수급 대상에서는 여전히 빠져 있어 의료비 걱정에 계속 시름하고 있다.'

◇ 안철수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 폐지" 공약으로 다시 관심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 후보가 기초생활보장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 폐지를 공약하면서 이 문제가 새삼 관심을 끌었다.

안 후보는 지난 2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절대 빈곤층의 부양 의무를 가족에게 미루지 말고 국가가 책임지는 시대로 가야 한다"며 이 공약을 내세웠다.

부양의무자 제도는 재산이나 소득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선정기준에 부합해도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이나 소득이 있는 자녀 등 부양가족이 있으면 각종 급여를 받을 수 없도록 하는 장치다.

하지만 부양의무자 기준은 빈곤 사각지대를 만드는 주요 걸림돌로 꼽혔다.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하려 해도 '부양할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급여를 받지 못하거나, 부양의무자의 부양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탓에 신청을 주저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양의무자의 범위는 1촌 직계혈족과 그 배우자이다. 다만 사망한 1촌 직계혈족의 배우자는 제외된다. 예를 들어 아들·딸이 사망하면 며느리·사위는 부양의무자에서 빠진다.

현재 생계급여, 의료급여, 주거급여, 교육급여 등 기초생활보장 주요 급여 중에서 부양의무자 기준이 남아 있는 급여는 의료급여가 유일하다.

정부가 부양의무자 기준을 단계적으로 완화 내지 폐지한 데 따른 결과다.

교육급여는 2015년 7월에, 주거급여는 2018년 10월에 각각 부양의무자 기준을 없앴다.

생계급여와 의료급여도 2017년 11월부터 부양의무자라는 '문턱'을 조금씩 낮춰 수급자나 부양의무자 가구에 중증 장애인 또는 노인이 있거나 한부모 가구인 경우 등에는 부양의무자 기준을 단계적으로 완화했다.

2021년 10월에는 근로 능력이 없는 등 생계 활동이 어려운 저소득 취약계층에 대한 생계급여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했다.

2000년 기초생활보장제도 시행 이전인 1961년 생활보호법이 제정될 때부터 수급자 선정 기준으로 이용됐던 생계급여의 부양의무자 기준을 60년 만에 없앤 것이다.

[기초생활보장 생계급여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현황]
[기초생활보장 생계급여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현황]

<자료:보건복지부>
그렇지만 의료급여에 대한 부양의무자 기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안철수 후보가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 폐지를 공약했지만, 완전 폐지가 아니라 완화 수준"이라며 "정말 중요한 의료급여에 대해서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는 이유다.

기초생활보장 실태 조사 및 평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소득·재산 등이 기준 중위소득의 40% 이하에 불과하지만,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의료급여를 받지 못하는 빈곤층은 50만명가량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준 중위소득은 국내 가구를 소득순으로 줄 세웠을 때 정확히 중간에 있는 가구의 소득을 말한다.'

◇ 재정 부담에 완전 폐지 주저…도덕적 불감증 우려도 발목
정부는 2020년 8월 열린 중앙생활보장위원회에서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적용될 '제2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을 확정했다.

이 계획에 따라 생계급여에 대해서는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기로 했고, 2022년 1월 예정이었던 시행 시기를 앞당겨 2021년 10월부터 시행했다.

다만 의료급여 부양의무자 기준은 그대로 존속하되, 개선하기로 했다. 당시 '의료급여를 포함한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 폐지'를 주장한 빈곤사회연대와 장애인단체 등에서 반쪽짜리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라는 비판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우선 정부는 올해 1월부터 부양의무자 가구에 기초연금 수급 노인이 있으면 의료급여 부양의무자 기준을 면제한다.

아울러 2023년 '제3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 수립 때 적정 본인 부담 등 재정지출 효율화 방안과 연계한 내용의 의료급여 부양의무자 기준 단계적 폐지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의료급여 부양의무자 기준은 적어도 2023년까지는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노경희 보건복지부 기초의료보장과장은 "현재로는 2020년 8월 중앙생활보장위원회에서 심의, 의결한 2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 외에는 별도로 검토하는 게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의료급여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에 당장 손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재정 부담 때문이다.

2020년 기초생활보장제도 관련 예산(약 13조6천억원) 가운데 무려 9조원가량이 의료급여 비용으로 쓰였다.

의료급여는 생활 유지능력이 없거나 생활이 어려운 국민에게 발생하는 질병, 부상, 출산 등에 대해 국가가 세금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제도인데, 근로 능력에 따라 1종(근로 능력 없음)과 2종(근로 능력 있음)으로 나뉜다.

1종 의료급여 수급권자는 병원 입원이 무료이고, 외래 진료를 받을 때도 1천~2천원의 본인부담금만 내면 된다. 2종 수급권자는 입원비의 10%, 외래 진료비의 15%(동네 의원은 1천원)만 부담하면 된다.

 [의료급여 본인부담 비용]
 [의료급여 본인부담 비용]

<자료:보건복지부>
의료급여 부양의무자 기준을 전면 폐지할 경우 연간 최소 3조원에서 최대 5조원(중위소득 40% 이하 기준)가량의 예산이 더 필요할 것으로 추정된다.

문재인 정부가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 폐지에서 한 발짝 물러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여기에다 가족 간 유대 약화나 도덕적 불감증 등을 들어 반대하는 일부 여론도 발목을 잡는다.

자녀에게 재산을 사전에 증여하거나 재산을 은닉해 의료급여를 받으려는 사람이 나오거나 의료 과다 이용 등의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안철수 후보는 이런 문제에 대한 대책으로 고의로 자산과 소득을 빼돌린 게 확인되면 수급 자격을 박탈하고 수급 금액을 추징하며, 의료 과다 이용자에 대한 불이익 조치 등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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