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이 서원 설립할 때 노비, 서책과 현판 등 하사받았다.

[뉴스프리존= 이준화기자] 정부는 시민단체 활동 경력을 공무원 호봉에 반영하겠다고 발표했다가 국민들의 비난이 커지자 그 계획을 철회했다고 한다. 다행이다. 국민들의 비판이 거셌다는 것에 대해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시민단체 경력을 공무원 경력으로 인정하겠다는 발상 자체에서 조선시대 ‘준 관직자’ 혹은 잠재적 관직자로 대우받던 유림 세력이 머리에 떠오른다. 문화의 힘은 참으로 질기다.

흔히 양반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4대 이전에 관직에 오른 조상이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조선시대 관직자와 유학자는 서로 다른 신분 계층이 아니었으며 함께 ‘양반’이라는 지배계층을 구성하였다. 관계에 진출하지 않은 유학자들이 준 관직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덕치를 표방한 조선시대 통치 이데올로기와 관련된다.

조선 건국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성리학(신유학)에 따르면 문무 양반 관료들의 주 임무는 국왕이 덕치를 행하도록 도와주고 백성이 올바르게 살도록 교화시키는 데 있었다. 왕이 백성을 교화해야 한다는 덕치의 원칙에서 벗어날 때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간언’을 하는 것이 관직자의 도리라고 보았다. 조선시대 삼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와 같은 정치기구는 양반관료들이 국왕의 전제적 통치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조선의 왕권은 중국의 명청시대와 비교하여 약했으며 대신 양반관료들의 권한은 강하여 거의 국왕의 동반자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James B. Palais의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참조).

관료 후보자들을 선출하는 과거시험 역시 행정과 관련된 전문적인 능력보다 얼마나 유학의 고전에 능통한가를 알아보는 데 중점을 두었다. 다시 말해서 조선시대 관직자는 정치와 도덕이 분리된 근대적 정치체제에서 볼 수 있는 전문적 행정관료가 아니었다. 유학자로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면 백성의 ‘어버이’요 ‘교사’가 될 자격이 충분한 잠재적인 관직자로서 인정받고 존경받았다. 유학을 공부하고 도를 닦고 덕을 행하는 것은 유교적 가치체계에 입각한 사회질서를 확립한다는 국가의 과업을 수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잠재적 관직자로서 유학자들은 지방행정에 크게 관여하였다. 국왕의 독주를 중앙의 관료들이 견제할 수 있도록 한 것처럼, 지방에서는 감사나 수령과 같은 지방관이 관할 지역을 왕의 대리인으로서 통치하는 데 있어 지역 유림의 자문을 받도록 하였다. 특히 16세기에 사화를 여러 번 겪으면서 유학자들은 중앙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거 낙향하여 서원을 설립하고 향약을 시행하며 향안을 조직하는 등 백성들을 교화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이런 활동을 통해 유학자들은 향론을 주도하게 되고 향권을 장악하게 된다. 예컨대 향안에 등록된 유학자들은 지방관의 행정에 자문하는 향소의 구성원들이었다.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은 대체로 임기가 짧았기 때문에 관할 지역의 사정을 잘 알지 못했으며 이런 지방관을 대신하여 유학자들이 향리를 감독하거나 직접 지휘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중앙의 관계에 있는 인맥을 동원하여 지방관에게 압력을 가하기도 하면서 지방정치를 이끌었다.

유림의 향권 장악을 주류 국사학자들은 조선시대 지방자치의 전통이 확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방 양반이 향촌사회의 유력자로서 지방 사회의 이익을 대변하고 지방관의 일방성을 견제했다는 것이다. 나는 반대로 중앙정부에 의해 지방이 식민지화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잠재적 관직자로서의 유학자들은 중앙정부로부터 독립된 호족이 아니라 지방관과 함께 중앙의 권력을 나눈 ‘통치요원’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림이 백성을 교육시키고자 서원을 설립할 때 중앙 정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사립교육기관임에도 불구하고 국왕을 비롯하여 해당 지역의 지방관들(수령과 감사)로부터 노비, 서책과 현판 등을 하사받았고 유생들은 군역과 균역에서 면제되었으며 기증된 토지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다. 유교적 가치를 가르치는 일이 바로 국가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서원, 향약, 향안 등을 통하여 유교라는 중앙의 가치체계를 지방의 민간사회에 확립시키는 동안 고려 이래 향촌의 토착세력이었던 이족의 대부분은 중인계급으로 신분이 하락되었다.

중앙정부의 통치요원으로서의 지방유학자들은 당연히 중앙 정치에 지극히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가능하다면 중앙의 관계에 진출하고자 하였다. 향촌사회에서 당당하게 행세하기 위해선 적어도 학문에 정진하고 유교적 예를 지키는 생활을 해야 했으며 나아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자가 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 지방의 양반들은 중앙의 명문세족과 친교를 맺고 통혼하여 인맥을 넓히고자 하였다. 그들은 평생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궁벽한 시골에 살아도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문제보다 중앙의 정치권의 동향에 더 관심을 많이 가졌다.

가령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의 피해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 하는 지역 현안에는 무관심했으며 실무적인 일은 향리들이나 하는 하찮은 일로 간주하였다. 비슷한 연대 중국(명•청대)의 사족들이 자신들의 거주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가지 사업을 벌였던 것과 대조된다. 명•청대 중국의 유학자들은 자금을 모아 도로와 교량을 짓기도 했으며 직접 조세도 징수하고 시장물가도 감독하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전경목의 <우반동과 우반동 김씨의 역사> 참조). 조선시대 후기 향촌사회에서 유림이 지방관보다 더 큰 권위와 양향력이 있었던 것을 지방자치의 전통을 세운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중국보다도 심했던 유림의 중앙지향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지방관과 그를 견제했던 유림의 갈등은 중앙과 지방과의 갈등이 아니라 중앙의 정치권에서의 당파적 분쟁이 지방사회로 이전되어 재현된 것으로 보여진다. 나아가 지방유림은 중앙집권적인 유교적 관료체제의 일부였으며 통치세력이었기 때문에 구한말 나라의 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개혁세력이 될 수 없었던 것도 놀랍지 않다.

현 정부는 시민단체에서 일한 경력을 곧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해 힘쓴 경력”이라 규정하고 공무원 호봉으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그 취지를 설명하였다(중앙일보 2018년 1월 9일자 16면). 이는 조선시대처럼 국가의 목적이 도덕적 가치의 실현에 있으며 공무원은 전문적 행정관료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조선시대 국왕이 유학자들을 도덕적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잠재적 관직자로 인정하고 그들의 서원 설립을 지원했던 명분과 너무도 비슷하다. 현 정부는 혹시 21세기에 조선시대 후기 양반 사회의 재현을 꿈꾸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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