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권 칼럼니스트

일심의 위력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가지 일에 온 정력을 다 쏟으면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지요. 도를 깨닫고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서부터 기술을 연마하고 놀이를 즐기는 일에 이르기까지 남이 볼 때 미친 듯한 그런 무엇이 없이 크게 성공한 예는 없습니다. 최소한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잊고 시간과 날짜 가는 것을 모르는 경지를 거치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경지이지요.

《유마경(維摩經)》에 보면 유마거사(維摩居士)는 하늘나라를 좁은 방 안으로 삽시간에 끌어내린 일까지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 말은 주자(朱子)가 한 말이지요. 즉, 그는 말하기를 “양기(陽氣)가 발하는 곳에는 쇠와 돌도 또한 뚫어진다. 정신이 한번 이르면 무슨 일이 이뤄지지 않겠는가(陽氣發處 金石亦透 精神一到何事不成)”라고 한 것입니다.

양기(陽氣)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해와 같은 기운이 양기입니다. 태양처럼 뜨겁고, 밝고,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기운이 양기이지요. 양기는 살아 움직이고 점점 커지고 자라나는 기운입니다. 생명이 점점 자라나는 것은 양기가 커지는 결과입니다. 반대로 차츰 늙어 죽게 되는 것은 양기가 쇠해 없어지기 때문이 아닌지요?

확 불면 꺼져버리는 불도 그것이 힘을 발휘할 때 돌도 녹이고 쇠도 녹입니다. 이것이 모두 양기가 발하는 곳이면 쇠도 돌도 또한 뚫어지고 마는 예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도 쉬지 않는 한결같은 정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신이지요. 정신이란 잡된 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성과 속된 것이 전혀 없는 초인간적인 힘을 가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본성인 것입니다. 육체로 인한 물욕(物慾)에 사로잡히지 않은 순수한 마음, 그것이 정신인 것입니다. 그것은 위대한 사랑과 지혜와 용기를 가진 것입니다. 그 정신으로 올바른 일을 해 나가는데 무엇이 이를 방해할 것이 있겠는지요?

양심의 명령에 따라 희생을 돌보지 않고 어떤 사명감에서 일을 하게 되면 없던 지혜와 용기가 솟아나게 되고 남이 느끼지 못하는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진리가 도와 진리의 위력(威力)이 함께 하고 진리의 체성(體性)에 함께하는데 무슨 일인들 이룩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것을『지성여불(至誠如佛)』이라고 합니다. 즉, 지극한 정성이 곧 부처라는 뜻이지요.

이와 같이 일심의 위력은 무서운 것입니다.《음부경(陰符經)》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하늘이 살기(殺氣)를 발하면 별과별이 자리를 옮기고, 땅이 살기를 발하면 용과 뱀이 먼저 육지에 일어나고, 사람이 살기를 발하면 천지를 뒤집는다.」

그리고 소태산(少太山) 부처님의《선외록(選外錄)》<도운개벽장(道運開闢章)>에 보면「천지 기운은 사람이 들지 아니하면 아무 변동과 조화가 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마음이 악심(惡心)으로 뭉쳐서 일심이 되면 천지 기운이 악화되어 온갖 천재지변이 나타난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선심(善心)으로 뭉쳐서 일심이 되면, 하늘에는 상과 별과 상서 구름이 뜨고 땅에는 우순풍조(雨順風調)하여 오곡이 등풍하나니 사람들의 일심된 위력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하고 일심의 위력에 대해 말씀 하셨습니다.

그럼 일심공부를 하는 표준은 무엇일까요?《수심정경(修心正經)》에 보면 수양(修養)에도 ‘외수양(外修養)’과 ‘내수양(內修養)’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일심공부를 하는 표준은 무엇일까요?《수심정경(修心正經)》에 보면 수양(修養)에도 ‘외수양(外修養)’과 ‘내수양(內修養)’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 외수양입니다.

1. 피경(避境) 공부입니다. 처음 공부할 때는 밖에서 유혹하는 경계를 멀리 피하는 것이요,

2. 사사(捨事)공부입니다. 긴하지 않은 일과 너무 번잡한 일은 놓아버리는 것이요,

3. 의법(依法)공부입니다, 진리에 의지 하여 안심을 구하며, 해탈법문에 의지하는 것이요,

4. 다문(多聞)공부입니다. 위인들의 관대한 실화를 많이 들어 국량을 크게 하는 것이지요.

둘째, 내수양입니다.

1. 집심(執心)공부입니다.

염불 좌선을 할 때와 일체 때에 마음을 잘 붙잡아 외경에 흘러가지 않게 하기를 소 길들이는 이가 고삐를 잡고 놓지 않듯 하는 것이요,

2. 관심(觀心)공부입니다.

집심공부가 잘 되면 마음을 놓아 자적(自適)하면서 다만 마음 가는 것을 보아 그 망념만 제재하기를 소 길들이는 이가 고삐는 놓고 소가 가는 것만 제재하듯 하는 것이요,

3. 무심(無心)공부입니다.

관심공부가 순숙하면 본다는 상도 놓아서 관하되 관하는 바가 없기를 소 길들이는 이가 사람과 소가 둘 아닌 지경에 들어가 동과 정이 한결같은 것입니다.

한 마음이 청정하면 백 천 외경이 다 청정하여 경계와 내가 사이가 없이 한 가지 정토(淨土)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지나치게 급히 묶으려 하지 말고 간단없는 공부로써 서서히 공부하며, 집심(執心)과 관심(觀心)과 무심(無心)을 번갈아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처음 공부는 집심을 주로 하고 조금 익숙하면 관심을 주로 하며 좀 더 익숙하면 무심을 주로 하는 것입니다. 또 궁극에 가서는 능심(能心)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지요.

얼마 전에 시집을 온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시집일 이 서툰데다가 할 일이 여러 가지라서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여쭈었지요. “오늘은 무슨 일을 제일 먼저 하오리까” “며느리야! 네가 제일 바쁘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먼저 하여라” “예. 어머님,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자기 방에 들어가 30분 동안 참선(參禪)을 하고 나왔습니다.

그런 다음 다른 일을 착수하는지라, 시어머니께서 “그 일이 그렇게도 제일 바쁜 것이더냐?” “네, 마음의 구정물 먼저 갈아 앉혀야 그 날의 모든 일이 다 잘 됩니다.” 시어머니는 처음에는 의아 했으나 집안 사를 처리하는데 순서를 잡아 척척 처리하여 나아가니 나중에는 며느리를 크게 신뢰하였다고 합니다.

일심이 청정하면 삼독고륜(三毒苦輪)의 지옥에서 벗어납니다. 일심이 청정하면 반야용선(般若龍船)에 지혜가 솟아나지요. 일심이 청정하면 정토극락에서 살게 되고, 일심이 청정하면 복전(福田)에 불공이 잘되며, 일심이 청정하면 성불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일심의 위력은 만사만난을 극복할 수가 있고, 일심의 위력은 8만4천마군 이를 잠재울 수가 있습니다. 우리 동정(動靜) 간에 일심공부를 놓고 사는가요? 아니면 일심을 챙기고 사시는지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1월 18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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