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칼럼] ‘40대 패싱론’의 배경은 ‘40대 진보대학생’의 꼰대질

자주성과 주체성을 망실한 한국의 40대

‘잃어버린 세대’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기존의 가치관과 사회상에 환멸과 염증을 느끼고, 반항과 도피의 행렬로 빠져든 일군의 청년들을 뜻한다. 노벨상 수상 작가이기도 한 미국의 유명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는 잃어버린 세대의 번민과 고뇌를 문학으로 형상화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잃어버린 세대로 규정되어야 어울릴 집단의 주류는 미국의 젊은 지식인 무리가 아니었다. 북해를 바라보는 플랑드르 지방의 해안가로부터 알프스 산맥의 고봉들이 줄지어 들어선 프랑스와 스위스 양국의 국경선에 이르는 서부전선의 기나긴 참호들에서 총탄과 포탄도 모자라 독가스로까지 죽어나간 수많은 유럽 청년들이었다. 대부분이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을 이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자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 등의 구라파 각국은 한 세대가 통째로 눈앞에서 물리적으로 사라지는 전대미문의 충격적 상황을 경험한다.

최근에는 잃어버린 세대에 내포된 함의가 조금은 바뀌었다. 장기화된 대규모 실업사태로 말미암아 사회에 진출할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해 정상적인 인생을 살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그 의미가 변화된 것이다.

그런데 21세기도 벌써 세 번째 10년에 접어든 우리나라에서는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번듯한 직업과 단란한 가정도 갖고 있는 중년 세대가 잃어버린 세대 구실을 도맡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콘크리트 지지층 역할을 수행하느라 여념이 없는 1970년대생 40대 유권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렇다면 멀쩡히 살아 있으며, 다른 세대와 견주어 단연 압도적으로 고용의 안정성마저 누리고 있는 남한의 40대가 왜 잃어버린 세대로 전락했단 말인가? 근본적 원인은 그들에게 온전하고 독립적인 세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세 가지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가 결여된 데 있다.

첫째로 독자적 세계관이 없다. 둘째로 후배 세대와의 공감대가 없다. 셋째로 세대를 대표할 정치권의 리더가 없다. 세대 전체가 자체발광 능력을 상실한 수동적인 반사체에 불과한 셈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15일 대전 중구 으능정이 문화의거리를 찾아 유세를 하는 가운데, 지지자들이 모여들어 거리를 메우고 있다.(사진=이현식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15일 대전 중구 으능정이 문화의거리를 찾아 유세를 하는 가운데, 지지자들이 모여들어 거리를 메우고 있다.(사진=이현식 기자)

2030 세대는 1970년대생들을 ‘40대 진보대학생’이라 부르며 야유하고 있다. 40대 중년 남녀들이 더불어민주당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행태가 총학생회 지도부가 가라면 로봇처럼 군말 없이 가고, 오라면 푸들 같이 고분고분 따라오는 예전 1980년대 대학생들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한 연유에서이리라.

그나마 과거의 대학생들은 자신보다 힘센 기성세대를 들이받는 패기와 결기라도 있었다. 이와 달리 오늘날의 ‘40대 진보대학생’들은 본인들과 비교해 아직은 사회경제적으로 약자일 2030 세대의 머리 위에서 권위주의적 권력자로 군림하려는 낡은 꼰대 근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추태를 서슴지 않고 있다. 한층 더 가관은 이들이 스스로를 정의롭고 도덕적인 진보주의자로 언죽번죽 자처해왔다는 점이다. 그러니 2030 세대 입장에서 40대의 위선과 꼴불견이 얼마나 비루하고 한심하게 여겨지겠는가?

40대 정치인은 40대와 결별해야만 큰다

40대 진보대학생은 본질적으로 기득권 586 세대를 비춰주는 거울이자, 성능이 저하된 라이선스 제품일 따름이다. 따라서 2030 세대는 깃털이자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40대를 굳이 상대할 필요 없이 몸통이자 원본인 586 세대와 직접 문제를 해결하길 시도한다.

586 세대 역시 무슨 명령과 지시를 내려도 조용히 유순하게 복종하는 40대의 의견에 굳이 번거롭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한다. 정치 분야를 위시한 남한의 사회 모든 영역들에서 ‘40대 패싱론’이 공공연히 회자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배경이다.

독자적 세계관이 없으면 세대를 대표할 리더가 출현하기 어렵다. 586 세대에게는 민주화에 대한 독립적 열망이 있었다. 2030 세대는 공정을 향한 자발적 갈증으로 목말라 있다. 반면에 40대를 상징하고 견인하는 시대정신은 1970년대 출생자들의 일부가 이미 나이 50살 문턱을 넘어선 현재까지도 종적이 묘연하다. 그들은 X-세대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냥 '꽝'이었다.

그러나 더러운 흙탕물에서도 연꽃은 찬란하게 피어나기 마련이고, 악취 진동하는 쓰레기통에서 꽃핀 장미꽃이 더더욱 아름다운 법이다.

40대 진보대학생들 틈에서 독보적 군계일학으로 등장할 1970년대생 리더가 단 한 명도 없다면 이는 40대의 몰락을 뛰어넘어 한국의 비극으로 귀결될지 모른다. 필자가 1970년대생 남녀들의 무지와 무기력을 쉬지 않고 질타하는 한편으로 1970년대에 태어난 유능하고 진취적이며 동시에 미래지향적 정치 지도자의 약진과 성공을 진정으로 고대하고 대망하는 까닭이다.

연꽃은 주변에 가득한 흙탕물을 서서히 밀어내며 자란다. 쓰레기통의 장미는 쓰레기통 안을 가득 메운 쓰레기들의 방해를 이기고 일어난다. 1970년대생 정치 지도자는 그가 생물학적으로 소속된 동년배들의 비겁함과 이기주의를 타파·극복하려는 투쟁을 맹렬하게 전개해야만 한다.

골육상쟁을 방불하게 만들 그와 같은 치열한 싸움 속에서만이 또래의 40대 진보대학생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독자적 가치관과 후배 세대와의 공감대를 그는 창출·확보할 수 있다. 40대를 개혁하는 40대 리더만이 선배 세대로부터는 두려움 섞인 존중을, 후배 세대로부터는 존경 어린 사랑을 받을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천만 명에 달하는 남녀들 가운데 제대로 된 정치지도자 하나 배출하지 못한다면 정말 부끄럽고 민망한 노릇 아니겠는가?

* 글쓴이는 정치웹진 '서프라이즈' 초대편집장,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이준석이 나갑니다> 공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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