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은 공주 우금치의 피눈물을 아는가?

윤석열이 제2차TV토론에서 “한반도 유사 시 일본 자위대가 개입할 수 있다.”는 말을 해 독립유공자 단체들이 분노하고 나섰다. 한국과 미국은 군사동맹에 따라 한반도 유사시 미군이 자동으로 개입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군사동맹을 맺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석열이 한미일 군사동맹을 들고 나온 것은 어떻게 하든지 보수를 결집시키고, 미국의 눈에 들어 선거에서 이겨보려는 꼼수로 읽힌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 비극을 알고 있다면 윤석열이 그런 망국적인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학 최후의 공주 우금치 전투

1894년 발발한 동학혁명은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텐진조약에 의해 일본도 자동으로 개입해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이 동학군을 전멸시킴으로써 끝났다. 세상을 바꾸어 보자고 일어난 동학혁명은 무기력한 조정과 외세 개입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김개남이 청주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계속 패퇴의 길을 걸을 즈음, 전봉준은 동학북접군과 협력하여 한때 충청도 일부와 경기도 일원을 장악하였다. 일본군이 조선의 국정을 농단하고 관군을 앞세워 동학농민군의 섬멸에 나서면서 남접은 힘을 모아 관군ㆍ일본군과 싸웠다.

남접의 동학군은 북접의 참여로서 그야말로 100만 원군을 얻은 셈이 되었다. 당시 전봉준이 지휘하는 남접 측의 동학농민군은 관군은 물론 당시 세계 최강을 뽐내는 일본군을 상대로 힘겨운 전투를 하고 있었다.

10월 9일(음력) 삼례 재기포 이후 10월 12일(음력) 동학농민군이 공주로 진격하면서 일본군과 접전이 본격화하였다. 대대장 미나미 쇼시로 소좌를 지휘관으로 하는 3개 중대는 전병력을 3분하여 공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마스키 대위가 이끈 제1중대는 동로(東路)로 장호원을 경유하고, 모리오 대위의 제2중대는 서로(西路)로 진위를 경유하고, 이스쿠로 미츠마사 대위의 제3중대는 중로(中路)로 양지를 경유하여 남하하였다.

학살부대는 일본군 3개 중대가 주력을 이루고 기타 조선정부군과 일본군이 양성한 조선 측 교도 중대, 그 밖의 일본군 수개중대와 대륙낭인들이 참가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처음으로 대규모의 접전을 벌인 것은 우금치 전투였다.

일본군은 동학군이 활동한 전국 여러 지역에서 동학농민군과 동학도뿐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무차별 학살하였다. 동학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점차 패퇴의 길로 빠져들었다. 북접 역시 남접과 같이 많은 희생자를 냈다.

우금치를 둘러싸고 4, 50여 회에 걸쳐 벌어진 동학농민군과 관군ㆍ일본군과의 전투는 시산혈해를 이루는, 그야말로 동학농민혁명사상 최대의 전투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배하여 논산방면으로 후퇴하면서 제2차 무장봉기는 점차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동학농민혁명은 좌절의 늪에 빠져들었다.

12월 7일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 관군 사이에 벌어진 우금치(牛金峙) 전투는 동학혁명 과정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고 일본군에 동학농민군이 가장 많이 희생된 싸움이었다. 이인리에서 공주읍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우금치다.

우금치란 이름은 고개가 험해서 소를 몰고는 넘을 수가 없는 고개, 즉 '우금치(牛禁峙)'의 금(禁) 자가 금(金)자로 바뀐 것이라고도 하고, 이 고개에 금광맥이 있어 소(牛) 만한 금덩어리가 들어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도 전한다.

12월 6일 이인리 전투에서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군 10만 병력은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이 이끈 관군과 일본 정예부대를 맞아 싸워서 크게 승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튿날부터는 공주성을 앞에 두고 우금치에서 쌍방의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완전무장한 일본군은 이날 새벽부터 우금치에 매복하고 있었다. 서편을 향해 일본군은 뒤쪽에서 해뜨기를 기다렸다가 진격해오는 동학농민군 쪽으로 햇볕이 눈부시게 비치자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동학농민군은 눈이 부셔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연신 언 땅 위에 고꾸라졌다. 일본군은 1대가 총격을 가하고 물러서면 2대가 나가 재차 기어오르는 동학농민군을 향해 쏘아댔다. 시체 위에 또 시체가 쌓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무수히 죽어갔다.

교활한 일본군은 민가를 뒤져 한복으로 갈아입고 어깨에 동학깃발을 꽂은 다음 총을 숨겨 동학농민군에 접근하였다. 우군인 줄 알고 반가와 다가가는 소박한 동학농민군들에게 일본군은 사정없이 총격을 가했다. 우리나라 전사사상 우금치전투만큼 처절했던 격전은 일찍이 없었다.

우금치에서 7일 동안 전투가 계속되어 하루에도 4~50 여 차례나 이 고개를 뺏고 빼앗겼으며 종내에는 2만 여 명의 동학농민군 주력이 5백 여 명밖에 남지 않을 만큼 큰 희생을 치렀다. 우금치 계곡과 봉황산 마루는 쓰러진 동학농민군 시체로 하얗게 덮혔고 산밑 시엿골 개천은 여러 날 동안 줄곧 핏물이 흘렀다. (공주 우금치에 대한 글은 관련 역사 자료 참조하여 작성됨)

25개 독립운동가 선양 단체 윤석열 비난 성명 발표

국가보훈처 산하 25개 독립운동가 선양 단체로 구성된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항단연)은 지난 25일 대선 후보 토론회 중 나온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유사시 일본 한반도 개입' 발언을 비난했다.

항단연은 27일 성명에서 "3·1절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난 2월25일 개최된 대선후보 2차 법정 토론회에서 듣는 사람의 귀를 의심케 하는 언사가 이뤄져 심히 유감스럽고 우려가 들어 분노하는 마음으로 오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며 "윤석열 후보의 이 같은 발언은 참으로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항단연은 "일본의 자위대가 해외 파병이 안달이 난 현재 상황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일본의 군대가 우리 영토에 발 하나라도 딛게 해서는 안 된다"며 "동학 농민 혁명을 진압하기 위한 유사시의 명분으로 일본이 처음 우리나라에 군대를 보냈었다는 역사를 복기해보면 단서 조항으로도 일본의 자동개입 여지를 남겨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항단연은 "유사시 우리 한반도에 일본의 무력이 다시 들어올 수 있다는 사고가 과연 대한민국이라는 독립선열들의 피로 탄생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라며 "하늘에서 우리 후손들을 바라보고 계실 수많은 독립선열께서 한탄하고 눈물을 흘릴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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