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랑 중국고전 평론가
이정랑 중국고전 평론가

[뉴스프리존] ‘병귀신속(兵貴神速)’과 상반되는 이 ‘완병지계’ 역시 중요한 지휘술의 하나다. 전쟁에서 시간이라는 요소는 기본적으로 쌍방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러나 쌍방이 처한, 입장의 차이와 내부 상황의 차이 등으로 인해 시간에 대한 필요성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같은 군대라 하더라도 각기 다른 상황에 놓여 있다면 시간에 대한 요구는 큰 차이를 보일 것이다. 그렇기에 용병술에서 ‘완급’의 비중은 매우 크지 않을 수 없다.

‘병경백자’ ‘애자(埃字)’를 보면 이 책략의 사용 시기에 대해 논하면서,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사용하라고 일러준다.

① 적이 우세한 병력으로 진군해오는데 그 기세를 맞아 오래 버틸 수 없을 때 
② 상황이 적에게 불리해져 속전속결을 벌이려 할 때 
③ 전투가 막 시작되어 적이 유리하고 아군이 불리할 때 
④ 상황으로 보아 침착한 대응이 요구되고, 먼저 손을 쓰면 위험할 때 
⑤ 적군이 여러 나라로 구성된 동맹군으로, 서로 시기하여 내분이 일어났을 때
⑥ 적의 작전 구사가 다양하고 변화무쌍하나 내부에서 누군가 견제하고 있을 때 
⑦ 천기와 지형이 적에게 불리하여 그 기세가 점차 꺾어질 때 

이 전략을 운용할 때의 관건은 적의 상황에 대한 세심한 관심과 연구 및 파악에 있다. 적을 무너지는 쪽으로 끌어드린 후 계략으로 도모하면 내 쪽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고, 전쟁 국면이 순조롭게 풀려 적은 투입으로도 큰 수확을 거들 수 있다. 삼국시대의 사마의는 요동을 평정할 때 바로 이 ‘완병지계’를 활용했다.

238년, 사마의는 4만 병력을 거느리고 요동에 세력을 틀고 있는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러 나섰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사마의가 이끄는 위군은 양평에서 공손연을 포위했다.(‘공기필구 攻其必救’ 참조) 당시 공손연은 병력에서는 사마의보다 우세했으나 식량이 모자랐다. 반면에 위군은 식량은 충분했으나 성을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더구나 큰비가 내려 여러 곳의 땅이 꺼져 몇 자씩 웅덩이가 생기는 바람에 성을 공격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사마의는 서둘러 속전속결을 시도하다가는 적의 우세한 병력을 이용하여 육박전으로 나오거나 포위를 돌파하고 달아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그와 반대로 어느 정도 시간을 끌면 공손연의 식량 문제가 더욱 커져 군심이 흩어질 것이고 그 사이에 위군은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잘 다듬어 놓으면 된다는 계산에서, 사마의는 ‘완병지계’를 쓰기로 결정했다. 그는 전투를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군영을 옮겨 포위를 풀어주지 않았다. 현재의 상태대로 양군의 대치 국면을 유지하려는 작전이었다.

적이 포위 돌파를 단행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마의는 큰비가 내리는 틈을 타 적이 성을 나와 나무를 하거나 방목하는 것에 대해 전혀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즉, 자기 쪽의 약한 모습을 일부러 노출 시킴으로써 적의 심리를 마비시키려는 것이었다. 공손연은 자기 군대가 수적으로 우세한 데다가 큰비가 내리므로 위군도 어쩔 수 없을 것으로 판단, 성을 지키며 방관만 하고 있었다. 쌍방은 빗속에서 30여 일 동안을 전투 없이 대치했다. 위군의 일부 장수들은 적을 포위하고서도 공격을 않는 점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으나, 사마의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라고 설득했다. 

비가 그치고 날이 개자 위군은 흙으로 산을 쌓고 땅 밑으로 통로를 파서 대거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공손연 진영의 식량은 이미 바닥이 나 있었고, 급기야는 서로를 잡아먹는 참상마저 일어났다. 공손연은 잔병을 모아 성을 버리고 포위를 뚫으려 했으나 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위군에게 전멸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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