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수사원(飮水思源)’이란 말이 있습니다. 물을 마실 때 그 근원을 생각하라는 뜻이지요. ‘음수사원’의 출전(出典)은 중국 남북 조 시대의 시인 유신(庾信 : 513~581)이 쓴 ‘징조 곡(徴調曲)’입니다.

「열매를 딸 때는 그 나무를 생각하고/ 물을 마실 때는 그 근원을 생각한다.」에서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보시다시피 원래는 ‘사원(思源)’이 아니라 ‘회원(懷源)’인데, ‘사(思)’보다는 ‘회(懷)’가 좀 더 그윽하고 깊은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두 구(句)를 줄여서 「낙실사수 음수사원(落實思樹 飮水思源)‘이라고 하지요.

유신은 양(梁)나라에서 벼슬을 해 상동국상시(湘東國常侍)를 지내고, 우위장군 (右衛將軍)을 거쳐 무강현후(武康縣候)에 봉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양나라 원재(元宰)의 명으로 서위(西魏)에 사신으로 갔으나, 그가 떠나 있는 동안 양나라는 서위에 멸망당했고, 그는 20 여 년 간이나 그곳에 억류돼 벼슬을 살아야 했지요.

이때 고향을 그리워하며 유신이 쓴 시가 바로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 ‘근본을 잊지 말자.’라는 말을 작년 3월 4일 대한상의 회장에 선출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직원들과 가진 첫 대화에서 이 말을 꺼낸 것입니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무엇이냐”는 직원들의 질문에, ‘음수사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백범(白凡) 김구(金九 : 1876~1949) 선생의 좌우명이라고 합니다. 김구는 국민을 나라의 근본으로 여겼습니다. 그 국민을 섬기는 그의 정신이 잘 드러난 것이 바로 임시정부의 문지기 청원이지요.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조각(組閣)이 시작되자 김구는 도산 안창호를 찾아가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안창호가 “그 무슨 소리요? 김 동지처럼 훌륭한 분을 어떻게 문지기로 쓸 수 있겠소?”라며 경무국장에 발령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김구는 젊은 시절 인천 감옥에 있을 때 유리창을 닦으며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느 때 독립 정부를 건설하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창문을 닦는 일을 하게 해주세요.” 김구가 미천한 신분인 백정의 의미를 자신의 호에 담은 것도 국민을 섬긴다는 정신의 발로였습니다.

‘완전한 독립 국민이 되려면 백정(白丁)의 범부(凡夫)라도 애국심이 지금의 나 정도는 돼야 한다.’는 바람으로 ‘백범(白凡)’으로 호를 고쳤습니다. 임정 시절에도 그의 몸은 항상 낮은 곳에 머물렀습니다. 청사 구석에서 불편한 잠을 자고 동포들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스스로 “거지 중의 상 거지”라고 토로할 정도였지요.

평소 백범이 생전에 애송한 시는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였습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러이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가는 이 발자취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터이니.’ 흔히 서산대사의 선시(禪詩)로 알려져있는 유명한 말입니다. 김구는 물을 마실 때 그 물이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했고, 눈 밭을 걸을 땐 자신의 발자국이 똑 바른 지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가장 존경한다는 요즘 정치인들은 오직 자신의 이익만 살피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픕니다. 그들이 남긴 발자국이 어지럽지 않은가요? 그렇다면 우리의 본원(本源)은 어디일까요?

첫째, 우주 만유의 본원입니다.

우주 안에 있는 온갖 사물, 곧 삼라만상의 근원은 진리입니다. 천차만별 형형 색색으로 나열되어 있으나 그 근원은 하나이며, 우리는 이를 진리라고 표현합니다. 궁극적 진리를 부처님·하느님·태극·무극·도·법·마음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이런 것이 다 우주 만유의 근원인 것입니다.

둘째, 제불(諸佛) 제성(諸聖)의 심인(心印)입니다.

심인은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일체 성현들이 깨친 본래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제불 제성이 시대와 장소를 따라 각각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출현합니다. 이렇게 각각 다른 표현으로 진리를 말하지만, 결국은 한 마음을 깨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불 제성은 한 결 같이 깨친 마음의 경지를 중생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지요.

셋째, 일체중생의 본성입니다.

이 말은 진리를 깨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의 본래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제불 제성의 심인과 일체중생의 본성은 둘이 아니요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도 깨치면 부처가 되고, 부처도 어두워지면 중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로 부처님의 마음은 보리심(菩提心)이요, 중생의 마음은 번뇌심(煩惱心)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뇌가 곧 보리요, 보리가 곧 번뇌이며, 부처가 곧 중생이요,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의 진리를 깨친 사람은 일체의 사량(思量) 분별(分別)이 끊어지고 마음이 텅 비어 걸리고 막힐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따로 좋아하는 일과 싫어하는 일도 없습니다. 좋은 경계(境界)와 나쁜 경계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텅 빈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천지의 도에 합하고, 도에 합하기 때문에 큰 덕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물을 마실 때도 그 근원을 생각하듯, 우리들의 본원을 깨쳐 진리 생활을 해야 하지 않을 런지요!

단기 4355년, 불기 2566년, 서기 2022년, 원기 107년 3월 29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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