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움으로 가벼움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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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움으로 가벼움을 기다린다
  • 이정랑 (중국고전 평론)
  • 승인 2022.04.03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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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 칼럼] 이중대경(以重待輕),

[뉴스프리존]"이중대경(以重待輕),무거움으로 가벼움을 기다린다"

이정랑 중국고전 평론가
이정랑 중국고전 평론가

이 말의 근원은 ‘손자병법’이지만 더 구체적인 내용은 당 태종과 군사전문가 이정(李靖)이 나눈 ‘당태종이위공문대(唐太宗李衛公問對)’라는 책에 나온다.

태종 : 손자가 말하는 ‘힘을 다스린다.’는 ‘치력(治力)’이란 무엇을 말함이오.“

이정 : ‘손자병법’에서 ‘가까운 곳에서 먼, 길을 온 적을 기다리고, 아군을 편안하게 해놓고 피로한, 적을 기다리며, 아군을 배불리 해놓고 굶주린, 적을 기다린다. 이것이 힘을 다스리는 방법이라고 한 것이 바로 그 말입니다. 용병에 능한 자는 이 세 가지 기다림을 다시 여섯 가지로 늘려 구체적으로 활용합니다. 즉, 유인 작전으로 적이 오길 기다리며, 냉정함으로 적이 초조해지기를 기다리며, 무거움으로 가벼움을 기다리며, 엄격함으로 해이해짐을 기다리며, 정돈된 모습으로 적의 혼란을 기다리며, 수비로 공격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거움으로 가벼움을 기다린다.’는 ‘이중대경’은, 안정감 있고 침착한 방법으로 적이 경거망동할 때를 공략하라는 것이다.

진시황 21년인 기원전 226년 10월, 진시황은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초나라를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진시황은 장수들에게 이 작전에 얼마나 많은 병력이 필요할 것 같으냐고 물었다. 젊은 장수 이신(李信)은 20만이면 충분하다고 답했고 노장 왕전(王翦)은 초나라를 정벌하는 데는 60만 이상이 안 되면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진시황은 왕전이 늙고 용기도 없다며 힐책하고는, 이신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신과 몽념(蒙恬) 등으로 하여 20만으로 초를 정벌케 했다. 왕전은 병을 핑계로 빈양(頻陽.-지금의 섬서성 부평 북쪽)으로 낙양해서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기원전 225년, 이신은 초나라의 평여(平與.-지금의 하남성 상채현 동남쪽)를 점령했고, 몽념은 침구(寢丘.-지금의 안휘성 임천현 경계)를 점령하는 등 진군은 어느 정도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이신은 형양(荊陽)을 소탕하여 초를 멸망시키는 대업을 완수할 것이라며 자신만만 해했다. 초의 대장 항연(項燕)은 이신의 군대가 진군해 들어오자 주력군으로 하여 그 뒤를 따르게 하며 3일 밤낮을 연속해서 이신의 군대를 괴롭혔다. 진나라 군대는 여기를 방어하면 저기가 터지고 저기를 막다 보면 여기가 터지고 하는 통에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항연은 게릴라전을 구사한 것이다. 이어서 항연은 진나라 군이 상대를 깔보고 마구 돌진하거나 쉽사리 도발에 응한다는 심리를 이용하여, 우선 패한 척 물러서다 복병으로 하여 불시에 공격을 가하게 하여 진나라군을 대파했다. 그리하여 이신이 앞서 세웠던 공은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다.

진시황은 이신이 대패했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화를 냈다. 진시황은 노장 왕전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 군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왕전은 두세 번 거절하다가 ‘나라 안의 장정들을 깡그리 동원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고 나서야 60만 대군을 조직해서 자신이 대장군이 되고 몽념을 부장으로 삼아 초나라 정벌에 나섰다.

왕전이 이끄는 60만 대군이 평여 일선에 이르자 초나라는 전국의 병력을 동원하여 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왕전을 즉각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진영을 안정시킨 다음 철벽같은 방어 태세를 갖추고는 싸움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초나라 장수들은 여러 차례 도발하기도 하고 진영 앞에서 욕을 퍼붓기도 했으나, 왕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왕전은 진지를 굳게 지키며 병마를 조련하는 한편, 식량을 충분히 조달하여 병사들의 식생활을 개선했다. 

그렇게 1년의 기간을 대치 국면으로 보냈다. 초나라 대장 항연은 진나라 군이 장기간 싸우지 않고 수비만 하는 것을 보고 전진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쉽게 공격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군은 심리적으로 동요하기 시작했고 사기도 떨어져 갔다. 이에 항연은 부대를 동쪽으로 철수시키려 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진군은 초군을 추격했다. 진군은 기남(蘄南.-지금의 안휘성 숙현 이남)에 서 초군을 일거에 섬멸했고, 항연은 자살하고 말았다. 승세를 몰아 진군은 초의 성과 진영을 마구 공략했다. 1년 후인 기원전 223년, 초왕 부추(負芻)가 포로로 잡힘으로써 초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이신은 적을 가볍게 여기고 함부로 전진하다가 실패했고, 왕전은 노련하게 ‘무거움’을 유지해서 승리했다. 싸움에 앞서 왕전은 냉정하게 적의 상황을 분석, ‘이중대경’이라는 작전 원칙을 확립했다. 작전 중에 왕전의 군대는 적진 깊숙이 들어가 있는 점에 유의하여, 아군의 전력이 강하다 해서 함부로 출전하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보루를 쌓는 등 수비태세를 튼튼히 하고 겁먹은 듯한 태도를 고수하여 적의 투지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단 전기가 형성되자 비축해두었던 힘으로 일거에 적을 섬멸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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