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산 김덕권 칼럼니스트

여여(如如)

저는 항상 여여(如如)한 것이 좋습니다. 본래 여여라는 말은 불가(佛家)의 용어로 ‘변함이 없는 마음’,‘속되지 않은 마음’이란 뜻입니다. ‘여여(如如)’라는 한자는 원래 산스크리트어 ‘타타타(tatahta)’의 의역으로, ‘물건의 본연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뜻이지요. 변화하는 세계의 변화하지 않는 존재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말합니다.

그럼 ‘여여’는 무슨 뜻인가요? 불교(佛敎)란 글자그대로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이 됩니다. 부처님이란 진리를 깨달은 인격체를 의미하지요. 중국어로는 불타(佛陀), 인도어로는 붓다(Buddha)라고 하는데 원래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진리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며, 그 진리를 깨우친 사람이라는 뜻도 됩니다.

부처님을 다른 말로 하면 여래(如來)라고 합니다. 이 말은 ‘여여(如如)하다’라는 말과 ‘오다(來)’의 합성어로서 여여 하게 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래를 산스크리트어로 ‘tathagata’ 라고 합니다. 이말은 ‘tathata(여여하다)’라는 말과, ‘gata(오다 혹은 가다)’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여래(如來)는 ‘오는 것과 가는 것’이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오고 감이 같기 때문에 왔다고 했지만 온 것이 아니고, 갔다고 했지만 가버린 것도 아닌 즉, 우주에 두루 머무는 진리의 화신(化身)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이 우주에 예외 없이 존재하고, 항상 작용하고 있듯이 부처님은 바로 그런 진리의 화신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보통 ‘여여하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의미하며 만법의 본성(本性)이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더 특별난 것은 없으며 평범한 것도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래서 뭔가 특별한 것에 집착을 두지 않고 지금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래가 위대한 존재인 것입니다.《금강경(金剛經)》첫머리에 보면 부처님께서 발 씻고, 탁발해 온 음식을 드시며, 조용히 앉아 계신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여래에게는 밥 먹는 일이나, 중생 제도하는 일이나, 발 씻는 일이 모두 똑같은 가치를 지닌 행위인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일을 평등하게 바라봄으로 옮고 그름, 삶과 죽음, 부처와 중생을 서로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의 모습으로 바라봅니다.

그렇게 되면 일상적인 평범한 행동들이 그저 관심 없이 지나가는 일로 볼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평범한 일상의 행동들이 곧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마음에서는 깨우치게 되면 뭔가 성스러워야 하고, 세속적인 것을 멀리해야하고, 항상 고뇌에 차 있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디가 물레를 돌리는 모습은 지극히 평범한 것인데, 오늘날에는 그것이 성스러운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물레를 돌릴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었으며, 사람들의 마음에는 물레를 돌리는 일이 아주 특별한 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상심이라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부처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자꾸 특별한 것만 좇기 때문에 평범한 것의 소중함을 모르게 된 것이고, 내 마음을 부처님 마음처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불교가 어렵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여여하다’라고 함은 ‘늘 그대로’란 뜻입니다. 우리는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제법(諸法)을 이야기하나, 그 본체는 담연(淡然)하여 물들지 않고, 허공과 같이 움직이지도 않아서 원만이 통하고 환히 밝아 항상 하므로 ‘여여’라 한 것입니다.

여여한 자리에서는 기쁘고 슬픈 것이 따로 없으며, 번뇌(煩惱)와 보리(菩提)가 따로 없으며,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으며, 잃는 것도  얻는 것도 따로 없는 것입니다. 억지로 이름을 붙여 하나라고 하지만, 하나라는 이름도 붙일 수 없습니다.

한 물건도 취하지 아니하므로 실다움이 없고, 한 물건도 버리지 아니하므로 헛됨이 없습니다. 마음밖에 따로 구할 길이 없으므로 실다움이 없고, 얻을 바가 없는 마음이 없어지면 온갖 덕성이 원만히 갖추어지므로 헛됨이 없는 것입니다. 여여한 자리에 서고 보면 학의 다리는 길고 오리의 다리는 짧으며, 산은 멈춰 있고, 물은 흐르는 등, 모든 도리가 불법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일체 모든 법이 불법인 것이지요.

《금강경》<구경무아분>제십칠에보면,“여여(如如)하다는것은어떤뜻입니까?”  여여하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니 마음이 진여(眞如)인 까닭에 여여라고 하느니라. 과거 모든 부처님들도 이 여여행을 행해서 성도(成道)하셨고, 현재의 부처님도 이 여여행을 행하여 성도하시고, 미래의 부처님도 이 여여행을 행해서 또한 성도하실 것이니, 삼세에 닦아 증득(證得)한 도가 다름이 없으므로 여여라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또《유마경(維摩經)》에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들도 또한 같으며 미륵(彌勒)에 이르러도 또한 같으며 나아가 일체 중생에 이르러도 모두 같다. 왜냐하면 ‘불성이란 끊어지지 아니하고 있는 성품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느니라.”

어떻습니까? ‘여여하다’는 것은 육진경계(六塵境界)가 나에게 주어지더라도 내 마음이 전혀 그 경계에 머물지 않고 속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그 사람 잘한다고 칭찬해주면 기분 좋아하고, 또 누구를 흉보기 시작하면 그냥 신바람이 나서 끊이질 않습니다. 그것이 다 우리가 육진경계에 속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어두운 마음에 속지 않는 것을 ‘여여하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허공은 어디서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 마음과 우리 마음이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겉모습(色)만 봅니다. 그러나 부처는 다릅니다. 겉(色)과 속(空)을 함께 보십니다. 그래서 흔들림이 없지요. 생로병사로 인한 삶의 폭풍이 아무리 거세게 몰아쳐도 부처는 여여한 것입니다. 조그마한 경계를 이겨내지 못해 마음과 몸이 오락가락해서야 어디 쓰겠습니까? 우리 한 결같은 사람, 여여한 사람이 되면 어떨 까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1월 26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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