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까지 고영훈 작가 제주갤러리 개관 초대전
한국적 극사실회화 흐름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리

[서울 =뉴스프리존] 편완식 미술전문기자=고영훈 작가는 200여 년의 시간을 견뎌온 달항아리를 그린다. '시간을 삼킨' 달항아리를 캔버스 위에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긴 시간을 빨아들인 항아리가 단순한 물체라고 하기보다는 스스로가 영물이 되어 비물질화 되어가는 모습을 페인팅으로 드러낸다. 항아리의 가장자리가 그 배경과 겹쳐지면서 캔버스 공간에 흡수되는 듯 보이고, 항아리가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는 달항아리 자체를 하이퍼 리얼리티(hyperreality)의 대상으로 삼아서 달항아리가 품고 있는 일루젼, 즉 달항아리의 시뮬라크르(simulacre)를 매우 세련되고 황홀하게 재현해내고 있다.

제주가 낳은 한국적 극사실회화의 선구자 고영훈의 개인전 ‘호접몽(胡蝶夢)’이 11일까지 제주갤러리 개관기념 특별초대전으로 열린다. 환영과 실재, 이미지와 대상의 ‘구별을 잊는’ ‘호접몽’은 곧 ‘관조’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 완숙기에 접어든 작가의 작업관 형성과정을 전반적으로 조망하는 자리다. 1970년대 초반 작품부터 2022년 2월 완성한 최신작까지, 환영과 실재라는 회화의 존재론적 화두에서 시작한 지난 50년간의 화업 전반을 다루는 일대기적 전시다.

전시의 명제는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바로 그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이다. 작가는 실재와 환영, 본질과 이미지, 대상과 회화 사이의 경계와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를 넘어 이윽고 ‘관조’의 경지에 도달한 작업 철학을 작품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2021년 작가는 ‘관조(觀照, Contemplation)’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다. 작가에게 ‘관조’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관찰하는 것이 아닌, 또 아무 의도없이 보여지는 것을 수용하는 것도 아닌, 즉 능동과 수동의 의미가 내포된 일차원적인 의미의 ‘보다’를 넘어선 단어다. 어떠한 (현실에 존재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대상의 본질을 통찰하여 실재화하는 것이 작가가 말하는 ‘관조’인데, 이 경지에 이르는 과정이 작가와 도자기, 환영과 실재, 이미지와 대상의 ‘구별을 잊는’ ‘호접몽’이다.

작가는 197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앙데팡당(Indépendant)’전에 ‘이것은 돌입니다’를 출품하며 주목을 받았다. 이는 당시 추상미술을 주류로 하던 한국 미술계에 일어난 일대 사건이었다. 20대 초반에 작가로서의 입지를 구축했다는 작가 개인의 의미를 넘어, 한국 현대미술사에서도 중요하게 평가되는 지점, 즉 한국적 극사실회화 태동의 순간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후 작가는 2차원의 일루전 세계를 3차원 공간으로 확장하는 실험을 감행한다. 문명을 상징하는 책장 위에 돌과 오브제, 꽃과 나비를 배치하며 다양한 변주를 시도하는 1980년대의 ‘돌-책’ 연작과 2000년대 이후의 꽃과 나비 등 자연물을 다루는 ‘자연법’ 시리즈가 바로 그 결과다. 또한 2000년대 초반에는 고영훈 후기 시대를 대표하는 항아리 시리즈가 등장한다.

문명의 상징으로 역할했던 고서의 책장이 이루어낸 배경은 작가 스스로 인식판이라고 부르는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의 의미를 함축한 백색 배경으로 진화했다. 극사실적으로 그려진 도자기들은 그 자체로 충분한 회화성을 획득하며, 흰 바탕 위 중력과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은 배치로 추상적인 개념 역시 동시에 구현한다. 작가는 더 나아가 비로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달항아리를 극사실적으로 화면에 등장시킨다. 이는 재현을 넘어 새로운 실재를 창조했다고 평가된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건 환영이 현실이자 실재 그 자체가 되게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캔버스를 인식판으로 삼아 관념 같은 목전에 당장 주어지지 않는 것까지 그리고자 한다”

그는 먼 옛날 도공이 자신만의 도자기를 빚었듯, 지금 그도 그만의 도자기를 붓으로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1970년대 초반 코트, 군화, 코카콜라 등 일상의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업부터 지난 2월에 완성한 최신작까지 고영훈 작가의 화업 전반이 소개된다. 환영과 실재라는 회화의 존재론적 화두 안에서 작가가 50년간 치열하게 수행하며 대상의 본질을 ‘관조’하는 경지에 이르는 과정, 곧 ‘호접몽’을 보여주는 자리라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적 극사실회화의 흐름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다.

인사아트센터 제주갤러리는 제주에서 활동하는 역량있는 작가들의 서울전시를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