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화랑아트페어 '지역미술이란 어떤 미술인가?' 주제강좌
김웅기 평론가 '"예술 상품화시대 새로운 미술담론 만들어져야"

[서울 =뉴스프리존]편완식 미술전문기자= 부산국제화랑아트페어가 8일 컬렉터를 위한 프로그램에서   '지역미술이란 어떤 미술인가?'를 주제로 강좌를 열었다. 강사로 나선 김웅기 미술평론가(mM아트센터 기획자문위원)는 "전지구적 네트워크 사회에서 지역미술과  세계미술의 구분은 무의미 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강연요지다.

언젠가 어느 강연에서 나는 세계라는 곳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자문하고 자답했다. 세계적인 작가라고 할 때, 그 작가가 속하는 세계라는 곳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라고 물었고, 그 세계라는 곳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 비장소라고 말했다.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공간이 세계라는 장소라고 답했다.

이번엔 다시 지역이란 어디에 있는 곳인가 묻는다. 우리들의 사전이라는 '위키토피아'에서는 지역을 “지리적인 면에서 다른 곳과 구별되는 지표상의 공간적 범위”라고 답한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동질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지구”로 “학술상으로는 일정한 목적과 방법에 의해서 구획되어진 특색이 있는 지구”라고 한다. 또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전체 사회를 어떤 특징으로 나눈 일정한 공간 영역”이라고도 한다.

결국 지역도 '세계'처럼 '추상화된 개념으로서 장소고 공간'이다. 경험적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인 것이다. 세계적인 작가가 소속이 없는 것처럼 지역 작가도 소속 따위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세계적 작가라고 할 때 그 말이 지시하는 내용을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고, 마찬가지로 지역 작가라고 할 때도 그 말의 내용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암암리에 세계적 작가는 국제적 작가이며, 국경을 넘어서 널리 알려진 작가라는 것이다. 국가의 범위를 넘어서 알려져 있는 작가라는 뜻이고 더 좁힌다면 미술 선진국의 특정 도시, 뉴욕이나 런던, 베를린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라고 알고 있다.

지역 작가는 세계적 작가에 대척점에 서 있는 작가다. 특정국가, 특정 도시에 한정되어서 거기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를 의미한다. 부산 작가, 광주 작가, 전주 작가, 경기 작가 등을 지시한다. 뉴욕작가, 런던 작가, 베를린 작가는 특정한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작가들도 분명 지역 작가인데, 지역 작가라고 하지는 않는다. 마치 흰색도 엄연하게 색인데도 백인은 유색인종이 아닌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지역이나 세계는 둘 다 비장소적 공간을 지칭하는 개념이며, 이 개념은 서로를 지탱하는 상보적 개념이다. 지역 없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지역 역시 세계가 생기면서 동시에 생겨난 개념이다. 구분을 위해서 생겨난 개념이므로, 세계와 지역을 동시적으로 나누게 되는 분리의 맥락에 관심을 둬야한다. 이미 나누어진 역사적 사회적 구조 아래서 지역의 문제나 세계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다분히 선택의 문제여야만 한다.

세계와 지역의 문제는 다분히 민족 국가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세계화의 과정 속에서 생겨나는 구분의 문제라면, 중앙과 지방의 문제는 민족 국가가 성립하면서 한 국가 단위 내에서 생겨나는 문제다. 한국처럼 강고한 중앙집권의 역사가 수 백 년이 넘는 나라에서는 중앙과 지방에 대한 구조는 이미 무의식화 되어 있다. 지방은 중앙을 떠 바치는 배후지고 대기하는 장소다. 중앙에 못가서 지방인 것이므로, 지방이라는 것은 운명적인 어떤 장소, 체념의 장소가 된다. 같은 지방 작가라도 서울 물을 먹고 낙향한 작가와 순수 지방/향토작가의 차이마저 존재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오는 지방과 중앙에 대한 이항대립은 1980년대 말부터 밀려 온 세계화라는 흐름으로 인해 중앙이었던 서울이 또 다른 지방으로 편입되면서 중앙/중심 자체가 국경 너머 다른 곳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과거의 중앙이었던 서울이 상대적으로 조금 더 시설과 인구가 집중된 지역으로 평준화되면서 지방이 새롭게 조명되고 재발견될 여지도 생겨났다. 한국 작가였던 서울 작가가 갑자기 로컬 아티스트로 전락해 버리는 시점이 생겨난다. 런던이나 뉴욕에서 서울작가가 평택작가와 같은 로컬 아티스트가 되면서, 이제 서울에서 자리를 잡아도 평택에서 자리 잡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어지는 세계가 생겨난 것이다.

편입이 되면서 지역 자체가 '이중화 되어버렸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국지적 차원에서 여전히 지방과 중앙의 차이가 엄존함할 뿐만 아니라 그 차이가 가속화 되고 있다. 세계적 차원에서 그 차이가 뭉개져서 동질적인 지역으로 묶어지는 상황이 생겨남과 동시에 한국내에서의 이질성이 더 심화되어 지역성 자체가 재지역화 되면서 이중화되어 버렸다. 세계적 차원이라는 시점이 국지적 차원으로 스며들면서 지역에 투영된 결과 때문이다.

지금 담론 공간에서 유행하는 지역이라는 언명은 세계화 시대에서의 활동공간으로서 세계적(global) 스케일과 국지적(local) 스케일을 넘나드는 특성을 지니게 되면서, 네트워크개념을 탄생시킨다. 중앙에 얼마나 가까이 있는 가로 결정되는 근접성(proximity)보다는 중심에 어떻게 접속되어 있는 지로 결정되는 연결성(connectivity)을 강조하는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비장소가 생겨나면서, 지역/지방과 중앙/중심의 조작적 이항대립이 네트워크를 통해서 매개되고 해소되었다. 과거의 범주적 구분 자체가 무효화되면서 그 자리에 네트워크와 플랫폼이라는 더욱 추상적인 개념적 공간들이 마치 실제처럼 우리 일상에서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다.

여전히 지역이라고 믿으며 살고 있는 구체적인 시공간, 즉 2022년도 부산 영도라는 지역의 자연 및 사회 역사적인 환경과 그 속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활동은 여전히 1933년도 서울 성북에서의 경험과 다를 것이며 2017년 뉴욕 이스트 빌리지와 완전히 다를 것이다. 각각의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속에서 느끼는 의미도 다를 것이고, 따라서 특정 지역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소위 지역정체성도 다를 것이다. 이 다름이 네트워크에 연결시켜주는 정거장처럼 플랫폼을 구성한다손 치더라도 각각 플랫폼 속에서 접속을 위해 조정되고 가공되는 과정을 통해서 네트워크에 접속되는 순간 모든 이질적인 차이 자체가 동질적인 상대적 차이로 전환되면서, 차이는 중화되고, 소통은 정보공유로 대체된다. 플랫폼에 반영되거나 포섭되지 못한 미묘한 것들은 사라지고 배제된다. 지각되지 않는 침묵의 언어체계인 시공간은 말로나 코드로 잡히지 않는 의미나 진실을 그 안에 담고 있으며, 다른 지역이나 문화 체계에서 다르게 해석될 가능이 있는 의미자체가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현대 미술은 그 자체가 국제주의적 기반을 가진다. 19세기 말부터 파리, 런던, 베를린, 비인 등 유럽의 특정 대도시에서 생겨난 각종 미술의 흐름과 양식들이 2차 세계 대전 전후로 뉴욕에서 국제주의라는 양식으로 묶어지면서 모던 아트라는 게 생겨났다. 아프리카나 태평양 섬나라 원주민들의 조형물조차 모던의 틀 안으로 녹여서 미술에 있어서 지역성이란 소재나 재료에 불과하였다. 국제화가 더 전면화되고 내밀화되어 소위 세계화되면서 지역이라는 게 새롭게 조명되고 재발견되면서 많은 비서구 사회의  '지역' 작가들이 세계적인 작가가 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세네갈 출신도, 멕시코시티 출신도, 중국 항조우 출신도, 태국 치앙마이 출신도 어느새 세계적으로 되기 시작했고, 당연히 서울이나 광주 출신의 세계적 작가도 생겨났다. 기본적으로 그 나라의 지역적 정체성에 뿌리를 두고 그 지역적 특징을 현대미술의 기본적 어법에 맞게 작업을 하면서 서구 백인 남성 일변도의 미술계가 유색과 마이노리티, 그리고 비서구 출신의 각종 지역 작가들이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국제적 미술 전시에 주체처럼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현대 미술의 전개과정은 놀라울 만큼 네트워크적이다. 현대 미술이라는 네트워크 속에 각 지역 작가들은 하나의 플랫폼처럼 연결되고 있다. 누구든 플랫폼에 들어와서 연결되기만 하면 이미 그 자체가 잠재적으로 세계적으로 되는 것이다. 나머지는 상대적 차이는 양의 문제일 뿐인 것이다. 더 많은 조회 수와 공유가 세계적인 것과 덜 세계적인 것을 나누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지역과 중앙의 이항 대립이 해소되고, 아니 해소되어가고 있는 현실속에서 지역 작가란 이미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아직 남아 있는 현실적인 차이는 시간이 경과함으로서 없어질 것이다.

사회 및 공간적인 실체인 개인이 그 자신과 그 자신을 둘러싼 다른 개인들과 집합적 생산활동을 어떻게 개념화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글로벌화가 가져오는 정보의 균질화로 인한 시공간의 변질은 우리의 생활 세계를 변모시켰을 뿐만 아니라 의미나 감정체계 조차 뒤흔들었다. 동시에 공학적인 조작에 의해 이전에 없던 새로운 종류의 개념과 지식이 유행처럼 흘러 다닌다. 즉 비가시적이고 설명불가능한 무언가를 가시화시켜 설명 가능하게 만들었다. 동어반복적인 조작을 통해 생성된 개념적 장치가 설명 가능한 대상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사회 자체가 정보를 기반으로 한 탈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서비스를 기반으로 하는 감정산업이 주요한 생산의 기반이 되면서, 사회 자체가 미학화되고, 예술화 되어간다.

이미 지역 자체뿐만 아니라 예술 자체가 문제가 되고, 새롭게 재발견 되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우리가 얼마 전까지 예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미 상업과 산업의 영역으로 수용되면서 예술은 그 존재의 기반을 새롭게 구축해야하는 예술의 위기를 넘어서 예술 위기의 위기 시대를 맞이해야하는 상황에 도래한 것이다. 어디에도 없는 세계가 어디에나 있는 지역성을 상대화 시켜버리면서 제거해 버렸듯이, 예술이 일상화되고 산업화및 생활화가 되면서 예술품 자체가 상품이 되어버린 시대에 예술이 예술일 수 밖에 없는 근거를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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