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김현태기자] 서울시의회 도시계획관리위원회 전철수 의원(더불어민주당, 동대문1)은 지난 14일 개최된 제274회 정례회 시정질문을 통해 노후화된 청량리역 화장실의 개선과 2번 출구 반쪽에스컬레이터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청량리역 전체 리모델링을 강력히 촉구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구간인 청량리역은 1974년 8월 15일 개통됐고, 현재 43년이나 된 가장 오래된 지하철역으로 하루 평균 6만명 정도의 승객이 승하차 하는 중요한 역이다.

현재 4번 출구 계단 중간에 설치된 화장실은 좁은 계단으로 다시 올라가야 이용이 가능해 교통약자 또는 지체장애인 등의 이용이 거의 불가능하고, 경의중앙선에 설치된 화장실 1개 외에는 1호선 구간 역사 내 유일한 화장실로, 다른 출구로 나가야 하는 승객도 250m를 걸어가 다시 4번 출구 계단을 올라가야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다.

전 의원은, 새롭게 시작한 서울교통공사의 김태호 사장에게 40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열약한 환경의 청량리역 화장실 개선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며, 어르신들과 시민들이 고통과 불편을 겪는 것에 대한 대책 마련을 주문했다.

뿐만 아니라, 편의성을 도모하기 위해 설치한 에스컬레이터가 중간까지만 설치돼 반쪽으로 운행되고, 35개의 계단을 걸어서 내려갔다가 개찰구를 통과한 후, 지하철 탑승을 위해 다시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야 하는 불편함을 지적하며,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고는 어르신 등 고령화 인구, 교통약자의 승차와 하차가 가장 많은 지역 중의 하나인 청량리역의 노후화와 이용하는 시민들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또한, 전 의원은 청량리역을 이용하는 장애인, 어르신 등 교통약자를 배려하기 위해 신규 에스컬레이터 설치가 가능한 장소를 제시하며, 4번 출구 화장실의 개선과 반쪽 에스컬레이터 문제 해결을 위한 청량리역의 전체 리모델링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마지막으로, “5년 전부터 건립된 지 43년이 지난 청량리역의 총체적 리모델링을 요구했다”을 언급하면서, “언제 착공될지도 모르는 경전철 사업만 기다릴 수 없다”며, “향후 경전철 사업이 추진되더라도 청량리역이 리모델링된 상황이라면 사업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으니 청량리역 전체 리모델링 사업과 종합적인 대책을 신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충청도 사람이 서울사람이 되기까지?

전철수 그는 18세때 현금 만 칠천원을 들고서 상경을 했다.

꿈 많고 배짱 두둑한 한 충청도의 청년이 두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이 버스에 올라 두근거리는 설레임 하나로 서울로 올라왔다.

홍성에서 나고 자란 그는 서울은 언젠가 도달해야 할 동경의 땅이자 무한한 기회의 세계였다고 밝혔다.

그렇게 열여덟의 젊은 청년 전철수는 단돈 만 칠천 원을 들고 서울로 왔다.

그가 서울에 와 첫발을 내딛은 곳이 바로 동대문이었는데 동대문은 출가한 누나가 터를 잡고 살고 있는 곳이라 심적으로 의지 할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젊은이 혼자 살기에는 척박한 땅이 바로 서울이었다. 그가 생활하는 과정 중 아들처럼, 때로는 동생처럼 따뜻하게 품어준 지인들이 있었기에 소중한 인연을 지금까지 맺어 동대문과의 연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5년간 동대문에서 터를 닦으며 청량리에서 조그마한 공업사를 열게 되었다. 그때 나이 스물셋,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건축에 쓰이는 창문과 새시 등을 시공하는 일을 시작해 전철수를 만들어준 의미 있는 사업장이었고 서울 생활에서 안정을 가져준 소중한 일터였다.

이때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가정을 꾸려나가며 사업의 규모도 점차 커지게 되었고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러던 90년대 초반 건설 붐을 타고 건축업을 시작하게 된 나이가 스물아홉, 어린나이에 직원들을 거느리고 거친 공사판 사람들과 함께 뒹굴며 사업을 이끌었던 시절, 그는 지금도 내 자신이 정말 대견했던 시절이었다고 회고 하고 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아내는 평소 봉사활동을 참 많이 했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청량리 일대에 어려운 여건에서도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장학사업을 하면 좋겠다는 제안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최소한 학비 걱정은 없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동사무소를 방문해 본인의 취지를 설명하고 대상 학생을 선정하여 장학금을 지원해주기 시작했다.

사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음에 장학금 혜택을 받은 학생들에게서 감사의 편지를 받을때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그는 남을 돕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원대상을 결손 가정의 아이들, 지역 단체등으로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업과 봉사를 병행하며 지역에서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전반기 시의회 환경수자원위원장을 맡으며 수질 개선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모습(좌에서

6번째 전철수 시의원)

◆사업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을 꾀한 시기는?

우연한 기외에 동대문의 이모를 자처하는 김희선 국회의원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가 나를 찾아와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도 좋지만 이왕이면 지역주민 전체를 위해 봉사할 생각이 없냐는.....

잠시의 망설임 속에 세월은 흘러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을 시작으로 정치인으로의 첫발을 내딛었다.

그렇게 정당생활을 시작한지 2년째 1998년 제2회 동시지방선거에 청량리를 지역구로 구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결과는 당시 재선의원과 경합을 벌여 180표 차이로 고배를 마셨으나 아쉬움 속에 가능성을 확인한 정치인으로 첫 출사표였다.

쓰디쓴 2등의 고배를 마시고 결과에 승복하며 지역주민과 함께 울고 웃으며 생활하는 정치인이 되어 4년을 정말로 열심히 뛰어다녔던 그 시절의 패기가 지금도 의정활동을 하면서 큰 밑거름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2002년 동대문구 26개 선거구 중 민주당은 단 4명이 당선되었다. 그중에 한명이 전철수가 초선으로 당선이 된 것이다.

이렇듯 그가 말하는 정치인은 주민들에게 진정성을 가지고 정성을 다하면 어떤 바람이 불어도 표로 보답이 온다는 것을....

그로부터 8년 동안 4대, 5대 구의원을 지내고 2010년과 2014년 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의회 8,9대 시의원으로 당선되어 동대문뿐만 아니라 서울시 전체의 발전을 위해 일하게 되었다.

1996년 정치 입문에서부터 현재까지 근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막연하게 본인이 가졌던 능력을 나누어 이웃을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부터 시작해 운명에 이끌리듯 시작하게된 정치활동 중에 많은 일들이 있었고 소기의 성과도 있었지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진정성을 무기로 동대문과 서울시의 발전을 위해 묵묵히 한 걸음씩 내딛는 발걸음을 믿고 응원해 주는 많은 분들의 힘으로 정치인 전철수는 오늘도 걸어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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