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락(同樂)과 독락(獨樂)이 있습니다. 동락은 함께 즐기는 것이고, 독락은 혼자 즐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개 노년에 이르면 쓸쓸하게 홀로 즐기며 살아갑니다. 늙는다는 것은 분명 서러운 일입니다. 그래도 늙었지만, 손끝에 일이 있으면 그런대로 견딜 만합니다.

그러나 쥐고 있던 일거리를 놓고, 뒷방 구석으로 쓸쓸하게 밀려나는 현상을 우리는 ‘은퇴(隱退)’라는 고급스러운 낱말로 포장하지만, 뒤집어 보면 처절한 고독과 단절이 그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은퇴는 더 서러운 것이지요.

‘방콕’이란 단어가 은퇴자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지 오래입니다. 세간에서는 그들을 ‘화백(화려한 백수)’, ‘불백(불쌍한 백수)’, ‘마포불백(마누라도 포기한 불쌍한 백수) 등의 말로 나누고 있습니다. 화백이든 불백이든 간에 마음 밑바닥으로 흐르는 깊은 강의 원류는 ‘눈물 나도록 외롭다.’는 사실을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화백’도 골프 가방을 메고 나설 때 화려할 뿐이지, 집으로 돌아오면 심적 공황 상태인 방콕을 면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집단에 소속되지 못하고, 지속적인 노동의 즐거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제 진 태양은 오늘 다시 떠오르지만, 은퇴자들은 어제도, 오늘도 갈 곳이 없습니다. 이럴 때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의 ‘독립’이란 시를 기억하며 혼자 웃습니다.

『대지팡이 짚고/ 절간에나 노닐까/ 생각하다가 그냥 두고/ 작은 배로 낚시터나 가 볼까 생각하네/ 아무리 생각해도/ 몸은 이미 늙었는데/ 작은 등불만 예정대로/ 책더미에 비추네』

어떻습니까? 곰곰히 생각해 보면, 방콕이 ‘독락(獨樂)’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어쩌다가 영화나 책을 둘이 나란히 앉아서 본다고 두 사람이 함께 보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나는 내 것을 보고, 당신은 당신 것을 볼 뿐이지요. 그래서 생애(生涯)도 혼자서, 죽음도 홀로 맞는 것입니다.

조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 1491년~1553)’은 경주 안강의 자옥산 기슭으로 낙향한 후,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인고(忍苦)의 7년 세월을 외로움과 함께 버텨 냈습니다. 사무치도록 외로워서 담을 헐어낸 자리에 살창을 끼워 계곡의 물소리를 눈으로 들으면서 세월을 보냈지요.

조선조 초의 학자 권근(權近 : 1352~1409) 의 ‘독락당기’를 보면, 홀로의 즐거움이 일목요연하게 나와 있습니다.

『봄꽃과 가을 달을 보면/ 즐길 만한 것이지만/ 꽃과 달이 나와 함께 즐겨 주지 않네./ 눈 덮힌 소나무와/ 반가운 빗소리도/ 나와 함께 즐기지 못하니/ 독락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글과 시도 혼자 보는 것이며/ 술도 혼자 마시는 것이어서 독락이네.』

어떻습니까? 옛 선비들의 독락에는 다분히 풍류적인 즐거움이 서려 있지만, 오늘의 백수들이 곧잘 읊조리는 방콕에는 궁상과 자탄(自嘆)이 한숨처럼 배어 있습니다. 강산과 풍월(風月)은 원래 주인이 없고, 한가로운 사람이 바로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홀로 독락을 못 즐길 양이면 풍월의 주인이라도 될 일이 아닌가요? 풍월주인은 정년도 없고 은퇴도 없다는데요.

하지만 우리가 더 즐겁고 행복한 모습으로 늙어 갈 수 있도록 ‘낭만결기(浪漫 結己)’일랑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방콕으로 세월을 보내며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방법으로 ’독락‘을 면하고 ’동락‘의 길로 접어들어 노년을 즐겁게 보낼 수 있을까요? 그건 아주 간단합니다. ’세상을 맑고 밝고 훈훈하게‘ 만들려는 도반 동지들이 모이는 <덕화만발>에 들어와 함께 즐기며 활동하는 것입니다.

저도 칠순 잔치를 끝내고 아내가 제 책상 위에 컴퓨터를 놓아 주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가 뭔지도 잘 몰랐지요. ’필요 없으니 치우라고 소리를 쳤으나 아내는 빙긋이 웃으며 방을 나갔습니다.

그러고는 저 홀로 책상에 앉아 호기심에 컴퓨터 자판을 두둘겨 보았지요. 참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독수리타법으로 오늘날까지 <덕화만발 카페>를 개설하고, 오늘 현재 총 3289회 째의 ‘덕화만발’의 글을 쓰며, 수많은 도반 동지들과 ‘동락’을 누리고 있습니다.

제가 만약 컴퓨터를 그나마 다룰 수 없었다면 지금쯤 무얼 하고 지냈을까요? 다리가 아파 걷지도 못하고, 주색잡기를 끝낸 지도 40년입니다. 꼼짝없이 <방콕>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 런지요?

우리 노년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삶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절제(節制)와 인내(忍耐)와 노력(努力)이란 값을 치르고 얻어지는 열매, 함께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동락’의 선물을 누리는 일이 아닐까요!

단기 4355년, 불기 2566년, 서기 2022년, 원기 107년 5월 10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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