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함으로써 수비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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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함으로써 수비한다" (1)
  • 이정랑 중국고전 평론가
  • 승인 2022.05.11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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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 칼럼]이전위수(以戰爲守) 
이정랑 중국고전 평론가
이정랑 중국고전 평론가

‘찬집무편(纂輯武編)’ ‘수(守)’의 수비에 관한 대목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성안에 설비가 이미 갖추어져 방어 태세가 완료되었다면, 나가 싸우는 것으로 방어를, 대신하는 기묘한 속임수를 낸다. 공격으로 포위를 푸는 것이다.

공격과 방어는 사물의 양면이다. 전쟁사에서 방어적 공격, 또는 공세적 방어와 단순 소극적 방어가 모두 쓴맛을 보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성을 지키는 쪽이 성안에서만 고수방어(固守防禦)하다 보면 식량과 무기가 떨어지고 적의 힘을 소모 시킬 수 없기에 장기간 포위당하면 성안에 갇힌 채 고생하다가 죽고 만다. 

송나라 때의 나대경(羅大經)이라는 사람은 ‘학림옥로(學林玉露) ’갑편(甲編‧권1)‘에서 “성을 지키기만 하고 공격하지 않으면 지키다 죽을 뿐”이라고 했다. 따라서 성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병력을 조직하여 수시로 출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포위망을 뚫고 원군과 연락을 취하는 등 방어를 하면서도 ’국부적 진공‘을 해야한다. ’싸우면서 지킨다‘는 ‘이전위수‘의 전술은 ’적극적 방어‘의 책략 사상이다. 성을 지키면서도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쪽은 대부분 이러한 ’이공위수‘나 ’지키는 가운데 공격이 있다‘는 ’수중유공(守中有攻)‘의 전술을 취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수, 장요(張遼)는 7천 병력으로 합비(合肥)를 지키고 있었다. 이곳은 손권의 10만 대군이 공격해왔다. 장요는 조조의 작전에 따라 지키면서 공격을 가하는 ‘이전위수’의 전략으로 ‘상대의 기를 꺾어 여러 사람을 안심시킨 다음 지켰다.’ 그리고 8백여 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성문을 열고 갑자기 손권의 군대를 공격하여 ‘오나라 군대의 기를 빼앗았다.’ 손건은 10여 일 동안 포위, 공격했으나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후퇴했다.’(‘삼국지’ ‘위서‧장요전’,) 장요는 약한 군대로 저 유명한 합비 방어전의 승리를 창출해 냈던, 것이다.

서진(西晉) 말, 대장 왕준(王浚)은 선비족(鮮卑族) 단취육권(段就六眷)과 말배(末杯) 등의 군대를 포함한 약 5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양국(襄國.-지금의 하북성 형대 서남)에서 석륵(石勒)을 포위, 공격했다. 석륵은 중과부적의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부장 장빈(張賓)과 공장(孔萇)이 건의 했다.

“적군은 많은 숫자가 먼, 길을 왔는데 우리가 이렇게 계속 방어만 하고 나가 싸우지 않으면, 그렇지 않아도 열세인 판에 군사들의 기강도 해이해질 것이 뻔해 성을 사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 북쪽 보루에다 돌문(突門.-성벽을 뚫고 낸 작은 문으로, 밖을 공격하려 할 때 갑자기 뚫고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을 20여 개 내서 적이 아직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있을 때 불의의 기습을 가해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야 합니다. 작전이 미쳐 수립되기 전에, 말하자면 미쳐 귀를 막기 전에 천둥을 치는 것입니다.”

석륵은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일단 병사들로 하여 성 위에서 북을 요란하게 두드리며 함성을 지르게 하여 적의 주력을 딴 곳으로 유인한 다음, 느닷없이 성 아래 돌문을 뚫고 나갔다. 돌문 밑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출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승세를 몰아 적을 추격하니 시체가 30여 리나 널렸고 기마 5천 필을 노획했다.(‘진서(晉書)’ ‘재기(載紀 제4‧석륵 상.’)

당나라 때 ‘안사의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이광필(李光弼)이 지휘한 태원(太原) 방어전에서도 위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광필은 여러 차례 땅 밑으로 길을 뚫고 나와 적을 기습하여 적진을 파괴하는가 하면, 거대한 투석기도 만들었는데 ‘2백 명이 끌어야 했고, 돌에 맞으면 한 번에 수십 명이 죽었다.’ 최후에는 ‘결사대를 출전시켜 적을 공격, 7만 명의 목을 베니’ 적은 패주하고 태원의 포위는 마침내 풀렸다.(‘신당서’ ‘이광필전’,)

역시 안사의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장순(張巡)은 옹구(雍丘.-지금의 하남성 기현)를 수비하고 있었다. 약 4만의 적군이 성 아래에 이르자 성내 군민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장순은 ‘적병의 기세가 예리하긴 하나 우리를 깔보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으니 지금 불의의 기습을 가하면 놀라 흩어질 것이다. 적의 기세가 다소 꺾인 다음 성을 굳게 지키면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몸소 1천 명을 몇 부대로 나누어 벼락같이 문을 열고 나가 맨 앞에서 적을 향해 돌진하니‘ ’사람과 말이 놀라 무서워 뒷걸음질을 쳤고 적은 마침내 후퇴했다.‘ 얼마 뒤 장순은 유명한 수양(睢陽.-지금의 하남성 상구현 남쪽) 방어전에서 같은 전술로 큰 전과를 올렸다.(’자치통감‘ ’당숙종지덕원년 唐肅宗至德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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