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게 그리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젊어서 저도 전 세계 원불교 교당의 순회 강연을 통해 많은 분을 감동시켜 본 적도 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걷지를 못하고, 말도 어눌하며, 기력도 딸려 감동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 청년이 길을 가다가 어느 노인과 마주쳤습니다. 청년은 혹시 자기를 기억하는지 물었지요. 노인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청년은 오래전 노인의 제자였고 선생님 덕분에 지금은 대학교수가 됐다고 했습니다. 노인은 그 사정이 궁금했습니다.

청년은 학창 시절 이야기를 꺼내며 반 친구의 새 시계를 훔쳤고, 그 학생은 선생님에게 도둑을 찾아 달라 말했지요. 선생님은 시계를 훔쳐 간 학생이 자진해서 용서를 구하기 바랬지만 누구도 감히 자신을 도둑이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모든 학생을 일어나게 한 후, 절대 눈을 뜨지 말라고 당부하며 학생들의 주머니를 뒤졌습니다.

그렇게 시계를 찾았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시계를 찾았으니 이제 눈을 떠도 좋다.” “그날 선생님은 제가 도둑이라는 걸 친구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제 자존심을 지켜 주셨지요. 어떤 훈계도 하지 않으셨지만, 저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분명히 알 수 있었어요.”

“그 일은 기억이 나네. 그날 모든 학생의 주머니를 뒤져서 없어진 시계를 찾았지. 하지만 난 너를 기억하진 못해. 왜냐면 나도 그때 눈을 감고 있었거든.”

어떻습니까? 이렇게 훌륭한 선생님이 계셨기에 잘못을 저지를 학생을 감동시켜 훌륭한 제자를 키워 내신 것이 아닐런지요? 종교계에도 우리 국민의 영혼을 감동시킨 세 분의 스승이 계셨습니다. 천주교의 김수환((1922~2009) 추기경님, 그리고 불교의 성철(1912~1993) 스님, 또한 기독교의 한경직(1902~2000) 목사님이 셨지요.

이 세 분이야말로 무욕(無慾)과 청빈(淸貧), 솔선수범(率先垂範), 용서와 관용의 대명사이셨습니다. 이 세 분은 각기 다른 종교를 떠받치는 기둥이시기도 하셨습니다. 이 세 분을 한데 묶는 공통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청빈(淸貧)이지요. 김수환 추기경님의 세상을 다녀간 물질적인 흔적은, 평소 입으셨던 신부복(神父服)과 묵주(默珠)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추기경님의 또 다른 유품이 지상에 알려 졌습니다. 기증한 각막을 이식받고 시력을 되찾은 어느 시골 양반이 용달차를 모는 사진이 게재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또 한 번 감동을 선사하셨습니다.

성철 스님 열반(涅槃)하신 뒤에, 스님의 삶이 알려지면서 불교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길이 많이 변했고 달라졌습니다. 성철 스님은 늘 신도들의 시주(施主)를 받는 것을 화살을 맞는 것(受施如箭) 만큼 아프고 두렵게 여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다 쌀이 한 톨이라도 수채 구멍으로 흘러간 흔적이 보이면, 다시 주워 밥솥에 넣으라고 불호령을 내리셨다는 일화는 한국적 농부의 삶을 백 분 이해하며 사신 큰 스님의 가르침이 돋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계의 큰 어른의 자리인 종정(宗正) 직을 오래 맡으셨지만, 중 벼슬은 닭 벼슬 만도 못하시다며, 종정 자리를 벗어날 기회를 찾으셨지요.

한국 대형 교회의 원조 격인 ‘영락교회’를 일으키신 한경직 목사님이 남기신 유품은 달랑 세 가지였습니다. 휠체어와 지팡이 그리고 겨울 털 모자가 전부였습니다. 집도 통장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작고한 이후, 개신교는 한 차례의 중흥기(中興期)를 맞아 신도 수가 엄청 많이 늘었습니다.

이 세 분의 성자(聖者)께서는 단순한 예수님의 말씀과 부처님의 가르침만을 전하셨던 분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부처님의 삶을 그대로 살아보고자 몸소 실천했던 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후세인들에게 온몸으로 보여 주시고 떠나셨습니다. 세 분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다음 세 분의 향기는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 국민 사이로 넓고, 깊고, 높게 멀리멀리 번져나갔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설교 중에 신도들을 울리고 웃기는 능변(能辯)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습니다. 그런데도 전설적인 목회자로 존경받은 것은, 그의 삶이 설교의 빈 구석을 채우고도 남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의 어느 신도가 한경직 목사님이 추운 겨울 기도를 하시다 감기에 걸릴 걸 염려해서 오리털 잠바를 사서 목사님께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였습니다. 영락교회에서 백병원 쪽으로 굽어지는 길목에서, 바로 그 잠바를 입은 시각장애인이 구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 아드님들도 목회자(牧會者)의 길을 걷고 있지만, 후계자라는 말은 한 번도 흘러나온 적이 없었습니다.

김수한 추기경님이 남긴 인생 덕목(德目)에 ‘노점상’이란 항목이 있습니다. “노점상에게 물건 살 때 값을 깎지 마라. 그냥 주면 게으름을 키우지만, 부르는 값을 깍지 말고 그대로 주면 희망을 선물한다.”

어떻습니까? 가히 이 세 분의 성자는 능히 영혼에 감동을 준 인류의 스승으로 추앙할 만한 분이 아닌가요!

단기 4355년, 불기 2566년, 서기 2022년, 원기 107년 6월 17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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