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佛家)의 참선법(參禪法)을 아시는지요? 참선(參禪)은 화두(話頭)를 일념으로 참구(參究) 하는 것으로 불가(佛家)의 대표적인 수행법입니다. 이 참선은 중국에 불교를 전한 달마조사(達磨祖師)에서 유래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선의 방법에 따라 앉아서 하는 좌선(坐禪)이 일반적입니다. 그 외에 형편에 따라 행선(行禪), 입선(立禪), 일하면서 하는 사상선(事上禪), 누워서 하는 와선(臥禪) 등이 있지요. 그리고 우리 원불교에서는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하는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을 주로 합니다.

그 외에 앉아서 하는 단전주선(丹田住禪)도 하지요. 어쨌든 이 선을 통해 동정일여(動靜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의 삼매(三昧)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참선 수행자들 사이에서 수행의 정도를 가늠하고 지도하기 위해 고도의 난제(難題)인 화두와 그 답을 주고받는 일을 선문답(禪問答)이라 합니다.

이 선문답을 기록한 조사어록(祖師語錄)으로 <임제록(臨濟錄)> <벽암록(碧巖錄)> <조주록(趙州錄)> 등이 유명합니다. 그러나 선(禪)이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를 보는 것입니다. ‘선(禪)’ 자를 보면 ‘볼 시 자(示)’에 ‘홑 단(單)자’가 결합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를 보는 것이 선이지요.

이 하나를 본 사람은 평상심(平常心)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이 평상심을 갖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견(我見)’과 ‘아집(我執)’만 없애면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아견과 아집’에서 해방이 될 때, 생사선악(生死善惡)을 초월한 평상심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정법수행(正法修行)과 진리 생활을 하게 되면, 그 결과 자연적으로 평상심을 얻어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도를 깨친다는 것은, 학문이나 지식으로 깨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의 진리,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깨닫는 일은 정법 수행을 통해야만 가능한 일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선의 경지인 진리와 내가 하나 될 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선열(禪悅)입니다. 선열이란 진리를 깨달아 마음이 안정될 때, 자기의 형편, 환경, 성질, 주변 사정 등과 아울러 깊이 생각하고 실천해서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데서 오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일본의 ‘스즈키 선사(禪師)’는 이런 체험을 두고 “이 세상에는 깨달음도, 깨달은 자도 없다. 다만 깨달은 순간만 존재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선열의 경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가시는지요?

그렇습니다. 선은 ‘잠시 멈추고 깊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좌선’하면 우선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석가의 좌선수행(坐禪修行) 모습입니다. 이는 베다, 브라만교, 힌두교 등, 전통적인 인도 종교의 수행 방법이지요. 기독교도 초대교회 시절부터 심오한 명상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명상을 정통신학과 다르다는 이유로 멀리해 온 것 같습니다. 그런 탓으로 개신교 신자 중에는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명상하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석가와 예수는 명상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고, 거듭난 초월적 구도자 이셨습니다.

석가는 보리수나무 밑에서 6년 간 명상으로, 예수는 사막에서 40일 간의 명상으로 선의 경지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석가와 예수의 명상 법은 사뭇 달랐습니다. 그 각기 다른 명상 법이 석가는 ‘자비’를, 예수는 ‘사랑’을 깨달으신 것이 아닐까요?

석가의 명상 법이 좌선 수행이었다면, 예수의 명상 법은 행선 수행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40일 간 광야의 기도,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몇 시간 기도 이외에는 예수가 앉아 명상했다는 기록은 별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를 예수가 광야(廣野), 산과 숲, 강가를 걸으시며 행선 수행을 즐기셨을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인도의 유명한 명상가 ‘오쇼’는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적인 무아의 경지가 선열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불가에서 말하는 주체와 대상이 하나가 되는 망아(忘我)의 경지, 즉 해탈(解脫)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오쇼는 “명상은 학문의 어머니요, 문화의 뿌리요, 인간 다운 인간으로 돌아가는 즐거운 길”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열’의 경지가 아닐까요?

원불교의 성가(聖歌) 중에 <선열의 노래>가 있습니다.

「법당(法堂)의 무상설법(無上說法)/ 도량(道場)에 솟는 법열/ 마음마다 청정심에 혜안(慧眼)이 트여 온다./ 어여루화 경사로세 어여루화 경사로세/ 선진(先進)은 이끌어주고 후진(後進)은 받들으며/ 이 공부 이 사업을 한 자리에 맹세하니/ 어여루화 경사로세/ 일원대도 만만세라.」

어떻습니까? ‘선열’의 경지가 이런 것입니다. 선은 종교를 초월합니다. 우리가 선을 통해 진리를 깨치면, 누구나 선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함께 참선을 생활화 하여 선열 속에서 이 선열의 노래를 힘차게 불러 보면 어떨까요!

단기 4355년, 불기 2566년, 서기 2022년, 원기 107년 6월 23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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