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 김덕권 전, 원불교문인회장

생사연마

요즘은 교당엘 나가도 죽음에 대한 설법은 잘 들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 삶이 죽음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서일 것입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이생을 마감할 날이 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라도 생사의 도를 열심히 연마해 보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세상에 아무도 생사윤회의 길을 벗어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간혹 아라한(阿羅漢)의 법력을 얻으면 이 생사윤회를 자유로 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누구도 이 생사윤회의 도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죽음이란 과연 어떤 상태일까를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오늘과 내일을 이어주는 것이 편안한 잠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금생(今生)과 내생(來生)을 이어 주는 것이 바로 죽음이지요. 따라서 죽음은 편안한 잠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고 영원한 삶의 일부이며, 새로운 삶을 위한 준비기간입니다.

죽음을 또 다른 삶으로 그리고 새로운 삶을 위한 편안한 안식(安息)으로 받아들이면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이유가 없어질 것입니다. 죽음도 나의 행복한 삶을 위한 진리의 사랑이며 축복으로 여겨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담담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물은 태어나서 자라며 늙고 병들어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자 연 법칙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아득한 옛날부터 살아왔습니다. 그 길고 긴 세월에 비하면 우리네 인생은 아주 잠시잠간 이 땅에 머물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모두가 영원 히 살 것 같이 남들보다 많은 것을 움켜쥐려고, 남들보다 더 높고 좋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보면 여간 불쌍하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서산대사 휴정(休靜 : 1520~1604)의 열반 송(涅槃頌)이 생각납니다.

生也一片浮雲起/ 삶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남이요,

死也一片浮雲滅/ 죽음은 한 조각 뜬 구름이 살아짐이로다.

浮雲自體本無實/ 뜬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으니,
生死去來亦如然/ 살고 죽고 오고 감 또한 이와 같구나.

그 한 조각 뜬구름처럼 살아온 인생, 저 역시 치열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래도 천만다행하게《일원대도(一圓大道)》를 만나 이제야 늘그막에 노락(老樂)을 즐기고 있습니다. 잘 쓰는 글은 안지만 매일 같이 [덕화만발]을 열심히 씁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줄기차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맑고 밝고 훈훈한 덕화만발 가족과 매일 뜨거운 사랑을 펼치고 삽니다.

그런데도 생을 마감 하는 날, 죽음의 공포에 떨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생사연마를 부지런히 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러 종종걸음을 칠 때는 이미 늦습니다. 평소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을 찾아 맹렬히 수행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 몇 가지를 골똘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내 몸이 사은의 공물이라는 것을 확연히 깨쳐야 합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이 죽으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흩어지고 맙니다. 이 몸은 철저하게 사은(四恩 : 天地 父母 同胞 法律恩)으로부터 받은 몸이라 언제나 개인의 몸이 아닙니다. 따라서 내 몸이 개인의 사사로운 것이 아니고 사은의 공물(公物)이라고 생각하면 삶에 대한 집착이 없어집니다. 내 몸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는 것이지요.

둘째, 현재에 계속 집중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 생각 속에 있는 것입니다. 삶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는 것이지 아무도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죽는 순간까지 현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잠을 잘 때는 잠자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글을 쓸 때는 일심을 다해 글을 씁니다. 사랑을 할 때는 온통 정열을 불사르는 것에만 몰입합니다. 이렇게 계속하면 죽음의 공포를 생각할 겨를이 없어질 것입니다.

셋째, 인과의 법칙을 철저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생사도 인과입니다. 순리대로 죽음이 온 것으로 알면 두려움이나 아쉬움은 없이 떠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지은대로 내생이 결정 되는 것으로 알면 삶에 대한 집착은 사라지고 맙니다. 태어나 죽지 않고자 하나 그 방도는 결코 없습니다. 늙으면 반드시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그럼 죽음도 인과의 결과로 알고 편안히 받아들이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어집니다.

우리는 평소에 죽음에 대한 마음을 챙기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죽음이란 한 생에 포함된 생명기능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 ‘죽음에 대한 마음 챙김’으로 생사를 연마하면 아마 죽음의 공포는 사라질 것으로 믿어 간단히 살펴봅니다.

하나, 죽음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수명은 계속 줄어드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살아있다 하더라도 수행할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피하려면 반드시 수행을 하지 않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 죽음은 언제 올지 모릅니다.

수명은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죽을 수 있는 원인은 매우 많고, 살 수 있는 원인은 적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약하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바로 수행을 하지 않으면, 사의 공포에 떨어지고 맙니다.

셋, 죽을 때 수행 외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을 때 친구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죽을 때 재산도 도움이 되지 않지요. 죽을 때 이 몸뚱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수행해야 죽음에 다다라 공포를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법상한 사람들은 현세(現世)에 사는 것만 큰일로 알지마는, 지각(知覺)이 열린 사람은 죽는 일도 크게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잘 죽는 사람이라야 잘 태어나서 잘 살 수 있으며, 잘 나서 잘 사는 사람이라야 잘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사연마를 부지런히 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잘 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생사연마 부지런히 해야 잘 죽고 잘 태어나 잘 살지 않을 까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2월 7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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