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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순절, ‘이웃종교의 고난 이해’
  • 김현태 기자
  • 승인 2018.02.11 20:31
  • 수정 2018.02.11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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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서소문 공원의 '순교자현양탑' ⓒ뉴스프리존

[뉴스프리존=김현태기자] “하나님은 한국어다. 히브리어로는 여호와이고, 영어로는 갓(GOD)이다. 인도어로는 데바고, 아랍어로는 알라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시편을, 모세에게 구약을, 예수님에게 신약을, 무함마드에게 쿠란을 각각 계시했다.” 파룩 준불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부터 25명의 선지자가 있는데, 이슬람에선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무함마드 등 5분을 하나님과 가장 가까웠던 분으로 여긴다”며 “그러나 가장 위대한 분은 하나님으로 예언자와는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예수님은 한국말로 하면 무함마드의 선배님”이라고 했다.

예수께서 수난을 당한 의미를 되돌아보는 고난주간과 사순절을 맞아 이웃종교의 고난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기 위해 마련했다. 모든 죽음은 슬픔이다.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당하는 죽음은 가장 억울한 죽음이다. 예수가 그랬고 이 땅의 수 만 천주교 순교자가 그랬고 조봉암을 비롯한 이 땅에서 바른 생각과 행동을 실천한 사람들이 그랬다. 근세 이전엔 사람을 죽이는 현장과 그 주검까지도 사람들에게 공개해 공포의 통치를 서슴지 않았다.

서소문 밖 처형지였던 서소문공원

한양성곽을 쌓고 4대문과 4소문으로 사람과 물자가 오갔다. 남소문인 광희문과 동소문인 혜화문은 ‘죽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갔다. 광희문을 ‘시구문(屍軀門)’으로 부르기도 한다. 서소문인 소의문(昭義門)은 ‘죽을 사람’들이 나갔다.

▲사진: 약현성당 순교자 기념관에서. 정약종의 아내 유소사와 아들 정하상, 딸 정정혜. 정약종과 큰아들 정철상은 신유박해(1801)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고, 기해박해(1839) 때 유소사는 옥사하고 정하상과 정정혜도 서소문 밖에서 옥사해 5명의 한가족 모두가 순교의 길로 갔다. ⓒ뉴스프리존

소의문 밖에는 염창이 있어서 무악재에서 흘러온 냇물 이름을 ‘염천’이라 불렀다. 염천 흙다리 아래 모래밭이 태종 때인 1416년부터 처형장으로 이용되었다. 정조가 죽은 다음해(1801년)부터 70년간 많은 천주교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신유박해(1801)로 이승훈(1756~1801)과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1760~1801) 등이 2월에, 강완숙(1760~1801), 정철상(?~1801)이 5월에, ‘백서사건’의 황사영(1774~1801) 등이 10월과 11월에 걸쳐 서소문 밖에서 순교를 한다.

기해박해(1839)로 5월에 9명, 7월에는 8명, 9월에는 정하상(1795~1839), 유진길(1791~1839),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1796~1839) 등 17명, 11월에는 정정혜(1797~1839) 등 7명이 순교합니다. 유진길의 아들 14살의 유대철(1826~ 1839)은 한 달 뒤 감옥에서 순교한다.

1866년 병인박해로 남종삼 등 3명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를 한다. 이 때 서소문 밖 순교자가 적었던 이유는 지방에서 대규모 처형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84년, 교황 바오로2세의 한국 방문으로 순교자 중 103분이 성인(聖人)으로 높여진다. 조선의 성인 중 44분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를 했다.

온 가족이 순교한 정약종 가족, 4대에 걸쳐 순교한 이승훈 집안

신유와 기해박해로 정약종의 5가족 모두가 순교를 합니다. 1801년에는 정약종과 큰아들 철상, 1839년에는 아내 유소사가 옥에서 죽고 작은 아들 정하상과 딸 정정혜가 순교를 한다. 정약종을 중심으로 가족관계를 보면 이승훈은 매부이고 황사영은 큰형 정약현의 사위이다.

▲사진: 절두산 성당의 대문 장식 ⓒ뉴스프리존

이승훈의 외삼촌이 이가환이다. 아내는 정약종의 여동생이다. 남인(南人)들 간의 혼인이며, 동지사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에 가서 프랑스 신부에게 조선인으로 처음 영세를 받는다(1873). 두 차례에 걸쳐 배교와 재입교를 했다가 순교한다. 1868년에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 1871년에는 증손자 연구와 균구가 순교해서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낸 집안이 되었다.

땅에 사는 사람의 끈질긴 관성

1899년 이후 철도가 등장하면서 서울역이 남대문 밖에 자리를 잡는다. 경의선이 서소문 밖 처형지를 지난다. 염천교라는 다리도 놓였고, 다리 밑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염천교를 지나면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구둣가게들이 모여 있다.

조선 후기에 나라의 재정이 부족했다. 군인들에게 봉급 대신 난전(亂廛)을 허용해 준다. 이들이 모여 서소문 밖에는 ‘칠패시장’이 이루어진다. 어선이 들어오는 마포(痲浦)가 가까운지라 어물(魚物)을 파는 상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서소문공원자리에 1970년대엔 수산물도매시장이 있었다. 그 후 수산물시장은 노량진으로 옮겨갔지만 아직도 약현성당 앞의 낡은 가게들은 생선을 판다. 사람들의 관성이다. 찾는 사람 거의 없는 서소문공원엔 천주교회가 세운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추위가 지나면 잘 곳이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천주교가 공인된 뒤인 1887년 블랑주교가 순교자 이승훈이 살던 마을 순화동의 수렛골에 세운 교리강습소가 1891년에는 약현성당(중림동성당)이 되었다. 1893년에 이 땅 최초의 서양식 교회를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98년 완공한 종현성당(1945년부터 명동성당이라 부름)보다 먼저 지어졌다.

이름도 끔찍한 절두산(切頭山)

한강가에 모래 언덕이나 낮은 산은 전망이 좋아 권세가들이 정자도 지어놓고 뱃놀이도 즐기던 곳이다.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1396~1486)이 소유했던 ‘희우정(喜雨亭)’이 대표적이죠. 희우정은 뒷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1454~1488)에게 넘어갔고 이름도 ‘망원정(望遠亭)’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포구 합정동(合井洞)은 옛날 양화나루 부근 마을에 ‘조개(蛤)우물(井)’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한강의 전망이 좋은 나지막한 산은 누에의 머리를 닮아 잠두봉(蠶頭峰)이라 불렀다. 이 잠두봉이 병인박해(1866) 이후 절두산이 되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권력을 잡았던 때는 서양세력이 끊임없이 조선도 침략했다. 조선에서 몇 차례의 박해가 있었지만 천주교 신자는 늘어났다. 사실 천주교는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도 했다. 천주교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이하응은 1866년 1월에 천주교 탄압에 나서 전국에서 6천명이 넘는 천주교도를 처형한다. 이 때 조선에 있던 12명의 프랑스 신부 중 9명도 죽는다.

1866년 5월,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에게 프랑스 신부의 죽음과 천주교도 대학살을 전해들은 프랑스는 군함 3척을 보낸다. 서강까지 왔다가 돌아가고, 10월에는 군함 7척과 해병대 600명으로 강화를 점령하였다가 11월에 철수한다. 이런 와중인 10월에 22명이 절두산에서 처형된다. 대원군 정부의 프랑스에 대한 강력한 대응 의지를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으로 보여준 거죠. 심문과정에서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올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사람들을 골라서 처형했다.

이 땅에 살았던 외국인들이 묻힌 곳, 양화진 외국인 묘지

땅이름 중 도(渡)나 진(津)은 ‘나루’가 있는 마을이라는 얘기고, 진(鎭)은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양화도(楊花渡), 양화진(津), 양화진(鎭)이라는 땅이름이 모두 쓰였던 곳이다. 조선 수군(水軍)의 주둔지 양화진(鎭) 터에 1860년 이후 이 땅에 살던 외국인들이 묻혀 묘지가 만들어 졌다. 베델, 언더우드, 아펜젤러, 헐버트, 테일러 등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주검이 있는 곳이다.

또 하나의 처형장 새남터

사남기(沙南基)라고도 불렸다. ‘한양 남쪽의 모래밭’이라는 의미겠다. 조선 초기부터 군인들의 훈련장으로 쓰였고 거물급의 처형장으로도 이용되었다. 1456년 성삼문 등 사육신이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이들의 주검은 한강 건너 노들나루의 낮은 산에 묻혔다.

▲사진: 절두산성당 ⓒ뉴스프리존

새남터에서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은 중국인 신부 주문모(1752~1801)이다. 그는 조선을 탈출할 수 있었지만 순교의 길로 갔다. 병인년(1801) 5월 마지막 날, 망나니의 칼에 목이 잘렸다. 기해박해(1839)에도 천주교 조선교구장이던 43세의 앵베르 주교와 35살 동갑이던 모방, 샤스탕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1846년에는 조선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가 백령도에서 체포되어 26살의 젊은 나이로 새남터에서 목이 잘렸다. 그의 주검은 18살의 청년 이민식이 지금의 안성시 앙성면의 미리내로 옮겨 장사지냈다. 병인박해(1866)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조선교구장이던 52살의 베르뇌, 28살의 브르트니애르, 27살의 도리, 26살의 볼리외 신부, 정의배(71세), 우세영(21세)도 새남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김현태 기자  kimht100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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