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세종대왕 ⓒ뉴스프리존

[뉴스프리존=김희수기자] 1392년 건국된 조선은 1910년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무려 518년이나 지속됐다. 단일 성씨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경우는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흔치 않을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물다.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나라가 운영된 덕에 조선은 학문·예술·과학·기술 등 다방면에서 꽃을 피웠다. 세종은 여러 가지 사업과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한 인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때론 독단적인 결정으로 조정 신료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반대 의견에도 세종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조목조목 반박하곤 했다. 이는 태종의 마스터 플랜으로 완성된 강력한 왕권과 세종 자신의 뛰어난 학문적 재능이 결합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로써 세종은 조선 문화의 황금기를 건설할 수 있었다.세종은 1443년(세종 25년)에 훈민정음을 완성하고, 1446년(세종 28)에 훈민정음을 세상에 반포했다.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의 여러 업적 중에서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친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로 평가받는 훈민정음은 세종의 주도 아래 집현전의 여러 학사들이 창제에 참여했지만, 기실 세종이 직접 창작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종은 뛰어난 음운학자였다. 그러나 그가 왕이었기 때문에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유리했던 것도 사실이다. 신료들의 반대가 극심했음에도 궁중에서 환관과 서리 들을 시켜 훈민정음 창제 작업을 계속했고, 모르는 것은 성삼문, 신숙주를 요동에 보내 음운(音韻)을 물어 오게 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지속적으로 배출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조선이 배출한 인재 중에는 지금의 기준으로 평가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걸출한 인물들이 많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1천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천재'이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조선이 낳은 걸출한 인재들 중에는 누가 있는지 아래의 목록을 통해 확인해보도록 하자.

1. 신숙주(申叔舟)

TV조선 '박종인의 땅의 역사'

조선 전기 문신이자 언어학자, 외교관이었던 신숙주(申叔舟)는 우리에게 세종대왕을 도와 한글 창제에 기여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신숙주는 3년 동안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창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최항(崔恒) · 박팽년(朴彭年) 그리고 성삼문 등과 함께 밤잠을 자지 않고 이 일에 매달렸다. 임금은 신숙주와 성삼문을 요동에 귀양 와 있는 중국의 음운학자 황찬(黃瓚)에게 보내 중국의 음운을 연구하게 했는데, 이때 이들은 시도때도 없이 요동길을 드나들었다.

마침내 1445년(세종 25)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 그러자 한문으로 글을 지으며 행세를 하던 벼슬아치와 유학자들이 들고일어나 크게 반대했다. 특히 어학 부분에 있어서는 가히 천재적인 능력을 지닌 인물로 중국어와 몽골어는 물론 여진어, 일본어까지 구사했다.당시 조선과 교류했던 나라들의 언어를 거의 다 할 줄 알았던 셈이다.

신숙주는 뛰어난 언어 구사 능력을 바탕으로 외교적으로도 상당한 성과를 일궈냈다. 일본으로 파견 갔을 때에는 군사적 요충지는 물론 일본의 관제, 풍속, 신하들의 족계 등을 일일이 기록했다. 일본어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때 신숙주가 기록한 자료들은 그의 저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의 바탕이 됐다. '해동제국기'는 후대 외교관들의 대일외교 지침서가 됐다. 몽골 · 서하(西夏) · 여진 · 일본 · 서번(西蕃)과 같이 중국 문자를 버리고 새 문자를 만드는 것은 오랑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이들의 어리석음을 타이르고 신숙주를 중심으로 한글을 활용하는 방안을 세우라고 했다. 신숙주는 《운회(韻會)》를 번역하고 이어 〈용비어천가〉 등 훈민정음을 사용한 글이나 번역을 도맡아 했다. 신숙주는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그는 설총이 사용했던 이두(吏讀)는 물론, 중국어 · 일본어 그리고 몽골어 · 여진어에 능통했고, 인도어와 아라비아 문자까지 터득하고 있었다. 그의 언어학 지식이 동원되지 않았다면 훈민정음의 창제는 지지부진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이런 기록이 전해진다.

2. 이이(李珥)

'5천원', '신사임당', '이기일원론' 등 율곡 이이(李珥)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많다. 그만큼 대중에게도 친숙한 인물이다. 이이(李珥, 1536 ~ 1584)는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이론가이자 의리의 실현을 위해 정치 일선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경세가이다.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사헌부 감찰 이원수와 신사임당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천재적인 면모로 유명하였다. 8살에 유명한 ‘화석정시’를 지었으며,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한 이래 29세에 대과에 급제하기까지 9번이나 장원 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리었다. 또한, 23세 때 겨울 별시 답안으로 제출한 ‘천도책(天道策)’은 곧바로 중국에까지 전해져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사진 강릉 오죽헌사당의 율곡 이이

특히 이이는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능력을 드러낸 인물로 유명한데,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소년 천재'라 할 수 있다. 이이는 한 번도 어렵다는 장원급제를 무려 9번이나 했다고 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렸다. 13살에 진사(進士)에 합격한 이래 29세에 대과(大科)에 급제하기까지 총 9번 장원급제에 성공한 것이다. 23세 때 별시(別試) 답안으로 제출한 천도책(天道策)은 중국에까지 전해져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이이는 46세 때가 되던 해에 정사(政事)를 논의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관리의 비행을 조사하여 그 책임을 규탄하는 일을 맡아보던 사헌부(司憲府)의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대사헌이란 나라의 중요한 직책이니, 기강을 세우고 풍속을 바로잡는 데 그 책임이 있다.” 라고 말하고, 옛글에 자기 의견을 보태어 풍속을 바로잡는 행동 강령 50여 조항을 써서 길거리에 내다 붙였다. 그가 내건 조항은 오륜(五倫)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이이는 그 조항을 한 번 지키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르쳐 주고, 두 번 지키지 못한 사람에게는 명령하고, 세번째에는 죄로 다스렸다고 한다. 그러자 백성은 즐겁게 따랐고, “이 어른이 부임한 뒤로는 모든 관청에서 부정한 일이 죄다 없어졌고, 또 길을 갈 때에도 서로 모두 공경하며 인사를 정중히 한다.” 라고 서로 말하였다고 한다.

3. 이순신(李舜臣)

▲사진: 인물사진 이순신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무장은 이순신을 비롯하여 조영무, 남이, 구인후, 정충신, 이준, 김시민, 이수일, 김응하 등 아홉 명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충무공 하면 오직 이순신 장군만을 떠올린다. 대체 그 까닭은 무엇일까?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다.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했던 왜군 장수 와키사카 야스하루가 후손에게 남긴 말이라고 한다. 이순신은 전란 내내 그처럼 놀라운 전략과 무용으로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러다 종국에는 죽음까지도 감추고 퇴각하는 왜군을 섬멸함으로써 남해의 수호신으로 거듭나기에 이른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위인 중 하나다. 임진왜란 당시 참전했던 모든 전투에서 승리해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해낸 이순신은 '거룩한 영웅' 즉 '성웅(聖雄)'으로 불린다. 이순신은 평소 전쟁사를 비롯한 역사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손자병법(孫子兵法) 등 병법서를 탐독하며 전략·전술을 익혔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이순신 친필.

한산도 대첩에서 일본 수군을 대패하게 만든 '학익진 전법'과 절대적인 수적 열세에도 대승을 거둔 명량해전의 사례는 이순신이 평소 연구했던 것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뛰어난 전략·전술은 노력으로만 완성된 게 아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소규모 전투경험밖에 없었던 이순신이 대규모 전쟁에서 전승을 일궈낸 것은 그가 얼마나 '천재'적인 명장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순신은 군사적인 부분 외에 문인으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가졌는데, 그가 지은 한시 '한산도가(閑山島歌)'는 문학적으로도 매우 우수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그의 단충(丹忠)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다. 비록 옛날의 양장이라 한들 이에 더할 수 있겠는가. 애석하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했구나. 병신년, 정유년 사이 통제사를 바꾸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을 초래하여 양호 지방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다.’

4. 김홍도(金弘道)

▲사진: 김홍도, 조선인물도

김홍도는 당대의 감식가이며 문인화가인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화원(圖畫署畫員)이 되었다. 강세황의 지도 아래 화격(畫格)을 높이는 동시에,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監牧官)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하였다. 1781년(정조 5년)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을 그릴 때 한종유(韓宗裕)·신한평(申漢枰) 등과 함께 동참화사(同參畫師)로 활약하였으며,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조선 후기 천재 화가 단원 김홍도(金弘道)는 '씨름', '무동' 등 서민 생활을 독창적으로 담아낸 풍속화로 유명하다. 특히 김홍도의 풍속화는 실제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김홍도는 풍속화뿐만 아니라 산수화와 인물화, 동물화는 물론 불화와 판화 등 다양한 장르에서 걸작을 남겼다. 장르를 아우르는 미술 천재였던 것이다.

김홍도는 비교적 이른 나이서부터 그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10대 후반에는 그림 솜씨가 매우 뛰어나야 가능한 '도화서 화원'이 됐고, 불과 28세에 어용화사(御容畵師)로 발탁돼 영조의 어진을 그렸다.

어용화사는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로 당대 화가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데, 김홍도는 영조와 정조 2대에 걸쳐서 이 같은 영예를 누렸다.

5. 정약용(丁若鏞)

▲사진: 인물사전

조선 후기 문신이자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은 실학은 물론 저술, 공학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18세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하고 발전시킨 선진적인 사상가.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했다.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여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했다.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반대파의 음모로 유배 생활을 하는데, 이때 자신의 사상을 완성한다. 무엇보다 그는 봉건사회가 안고 있는 갖가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회 개혁안을 내놓았다. 정약용이 저술한 일종의 행정지침서인 《목민심서》는 그의 저술을 정리한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특히 정약용의 저서를 보면 그가 얼마나 박학다식한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토지제도 및 조세제도 개혁 방향을 담은 '경세유표'(經世遺表), 관리들이 지켜야 할 지침이 담긴 '목민심서(牧民心書)', 형법을 다룬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그의 대표 저서들이 증거다. 또한 정약용은 기존의 양반 사대부들이 잘 알지 못했던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임업이나 어류와 관련한 저서도 저술했다. 과학기술 분야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정약용은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문·이과를 아우르는 천재다. 정약용의 발명품이자 수원 화성 건축에도 이용된 거중기를 그의 이과적 능력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6. 김정희(金正喜)

조선 후기 문신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서예와 그림, 금석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천재였다. 특히 예서체와 행서체에서 경지를 이룩한 김정희는 그의 호를 딴 추사체(秋史體)를 창조했다. 추사체는 강렬하면서도 정돈된 느낌을 주는 서체로 당시 많은 사람들이 추종했다.

▲사진: 인물사전 김정희

김정희는 뛰어난 서예가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초기 금석학 연구를 정립한 위대한 학자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신라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는 김정희가 1816년에 발견하고 판독한 것이다.

그 밖에도 김정희는 일체의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필선과 먹빛만으로 완성한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 등 훌륭한 미술작품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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