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의 메시지버스] 사상공세는 사면초가에 내몰린 정권의 최후의 비상구

주사파, 김영삼 정권을 구하다

시계가 거의 30년 전으로 갑자기 거꾸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총체적 위기에 봉착한 민생경제 살리는 일 하나만 하는 데도 시간이 턱없이 모자랄 윤석열 대통령이 느닷없이 주사파와의 전쟁을 선포한 까닭에서이다.

주사파 소동은 지금은 고인이 된 박홍 신부가 남한 전역에 수만 명의 주체사상 신봉자들이 암약하며 북한의 지령에 따라 대한민국의 체제전복을 획책해왔다는 주장을 느닷없이 펼쳐놓은 사건을 계기로 촉발되었다. 당시 박홍 신부는 국내 유수의 대학으로 손꼽히는 서강대학교 총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더욱이 발언 장소는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손수 주재한 전국 주요 대학 총장들 모임이었다. 김일성 북한 주석이 심장마비로 돌연 사망한 지 불과 며칠 밖에 경과하지 않은 시점인 터라 박홍 신부의 얘기에는 뭔가 명확한 근거와 뚜렷한 신방성이 있는 것처럼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매체들은 일제히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하였다.

허나 나중에 확인된 바로는 박홍 신부는 현재의 네티즌들 표현을 빌리면 이른바 뇌피셜, 곧 본인의 일방적 추측과 어림짐작에 기초한 이야기를 발설한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박홍 신부가 점화시킨 주사파 박멸 캠페인은 김일성 조문 파동을 빌미로 삼아 시작된 보수적 극우냉전세력의 매카시즘 공세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우루과이 라운드 무역협상에서 우리나라 정부가 덜커덕 합의해준 한국 쌀시장 개방 결정과, 서해 페리호 침몰 사고 등의 잇따른 악재가 겹치며 수세에 직면해 있던 김영삼 정권과 민주자유당이 전세를 일거에 반전시킬 수 있는 기회와 돌파구를 박홍 신부가 그즈음 집중적으로 쏟아낸 자극적인 주사파 관련 언급들이 마련해준 덕분이었다.

박홍 신부가 제시한 숫자의 주사파가 남한에 실제로 존재했다면 그들의 한반도 적화통일 노력은 전연 성공하지 못했다. 아니, 성공은커녕 남조선 해방 실현을 위한 변변한 시도조차 주사파들은 못해봤다. 대신에 한 가지 성과만은 확실히 이뤄냈다. 임기 초반의 높은 지지율과 압도적 기세를 차츰차츰 잃어가며 비틀거리던 김영삼 정권이 정국의 주도권을 단박에 회복할 수 있는 영양가 만점의 보양식 역할을 진짜로 있는지, 없는지 종적이 묘연한 남한 내의 거대한 주사파 무리가 결과적으로 제대로 기특하고 훌륭하게 해줬다는 점이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범”이라는 가설이 만약에 옳다면 주사파의 몸통이자 본진은 평양 주석궁과 북한의 사로청이 아닌 서울의 청와대와 남한의 민자당이었던 셈이다.

허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야당의 거물 정치인 출신이자 왕년의 민주화운동의 기수다운 품격과 절제력만은 끝까지 지켰다. 검찰과 경찰과 국가정보원이 대대적 공안 몰이에 나서고, 보수진영에 속한 수많은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요란하게 색깔론을 제기하는 와중에서도 필자가 기억하기로는 김 전 대통령이 주사파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김영삼은 ‘북한추종 세력’이니 ‘급진과격 분자들’이니 같은 완곡어법을 사용하며 직접적으로는 야당인 민주당을 견제하고, 간접적으로는 평생의 숙적인 김대중을 압박했을 따름이다.

김영삼과는 달리 윤석열 대통령은 본인 스스로가 주사파를 거론했다. 이는 김영삼은 물론이고 흉포한 군사독재자로 지탄받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등의 통치자들조차 좀처럼 하지 않았던 체통 떨어지는 볼썽사나운 행동이다. 세 명의 군인 대통령들은 주사파란 거칠고 선정적 용어의 동원과 구사는 각종 공안기관들에서 활동하는 하급자들에게 주로 맡겼다. 윤석열 대통령 입에서 주사파 소리가 나온 게 얼마나 생경하고 이례적이며, 동시에 을씨년스러운 경우인지 생생하게 웅변하는 대목이다.

색깔론으로는 더 이상 민심의 신뢰와 지지 못 얻어

그렇다면 윤 대통령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과 반정부 성향의 시민사회단체들을 상대로 왜 뜬금없이 급작스럽게 “네가 종북주사파인 걸 네 스스로 알렸다!” 식으로 호통 치는 시대착오적 원님 재판을 질척거리게 선보인 것일까?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원외당협위원장들과 만나 "종북 주사파와는 협치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또다시 식상한 '종북-북풍' 몰이에 치중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고물가·고환율·주가폭락 등 경제난에 일본에 구걸 자세로 일관하는 듯한 외교 참사와 일본 해상자위대가 독도 인근에서 전범기인 욱일기를 걸고 훈련한 데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지자, 국민의힘에선 또 '북한' 얘기를 꺼내들며 '북풍' 몰이를 시도하려는 모습인데 여기에 윤석열 대통령도 합세한 모습이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원외당협위원장들과 만나 "종북 주사파와는 협치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또다시 식상한 '종북-북풍' 몰이에 치중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고물가·고환율·주가폭락 등 경제난에 일본에 구걸 자세로 일관하는 듯한 외교 참사와 일본 해상자위대가 독도 인근에서 전범기인 욱일기를 걸고 훈련한 데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지자, 국민의힘에선 또 '북한' 얘기를 꺼내들며 '북풍' 몰이를 시도하려는 모습인데 여기에 윤석열 대통령도 합세한 모습이다. 사진=연합뉴스

어떤 정권이든지 간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세가 조성된 상황에서는 웬만해서는 반대파를 겨냥한 마녀사냥에 착수하지 않는다. 스탈린은 강제적 토지 집산화와 무리한 공업화 추진으로 야기된 농민층의 저항과 노동자 계급의 반발을 억압·통제하려는 목적으로 대숙청의 닻을 올렸다. 김일성은 6·25 남침전생이 참담하게 실패로 돌아간 책임이 박헌영이 미 제국주의자들의 스파이 구실을 오랫동안 수행해온 탓에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음모론을 내세워 남로당 계열 인물들을 모조리 잔인하게 숙청했다. 휴전선 이남의 한국 역시 북한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공안사건은 정권이 심각한 위기국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요긴한 출구전략으로 빈번히 활용돼왔다. 이와 같은 유혹에서는 심지어 문민정부를 자처한 김영삼 정권마저 자유롭지 못했었다.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가졌던 역사적 명분과 정당성도, 화려한 정치경력과 공고한 지지기반도 없다. 색깔론에 기대어 당장의 궁지를 모면하고 싶은 충동이 YS와 견주에 윤석열에게 몇 배는 더 강력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개인적 배경이자 구조적 요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입장에 놓여 있다. 경제에서는 물가는 치솟는데 성장률은 저하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전면화할 조점이다. 정치 분야로 눈을 돌리면 이준석 숙청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다가 여론조사 지지도가 반토막이 나다시피 했다. 영부인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의혹과 리스크는 좀체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을 기면서 공직사회에서는 사보타지에 가까운 노골적 복지부동이 횡행한다.

윤석열 정권 들어와 최강의 유력한 오피니언 리더 그룹으로 부상한 집단은 수시로 가짜 뉴스를 퍼뜨리며 돈벌이에 골몰하는 가로세로연구소 부류의 질 낮은 극우 상업 유튜브 방송들이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윤석열 대통령은 극우화하기에 딱 좋은 정치적 공간에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갔다. 한마디로 낮에는 뉴라이트들이, 밤에는 틀튜버들이 용산 대통령실을 번갈아 쥐락펴락하는 황당하고 엽기적인 형국이다.

여권 전체가 극심한 난맥상에 빠진 이 판국에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에는 정상적 민심과는 철저히 괴리된 당심이라는 이름의 정체불명의 유령이 당사를 거침없이 활보하고 있다. 필자는 대통령 부부가 잠시나마 마음의 평안을 찾아서 법사와 도사들을 조용히 만날 수도 있고, 점집과 무당집에 은밀히 사람을 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대통령이 이제는 실존 여부가 불분명해진 주사파에 대한 국민들의 과도한 두려움과 공포심을 의도적으로 앞장서서 조장하며 자기만의 허황된 상상의 세계에 갇히는 사태는 단지 특정 정권의 몰락과 실패에만 머물지 않고, 국가 차원의 재앙과 참사로 연결될 수가 있다. 1시간 중에 혼자 59분을 떠든다는 대통령에게 쇠귀에 경 읽기 하는 심정으로 또다시 각성과 변화를 촉구해야만 하는 필자의 처지가 씁쓸하게만 느껴진다. 가을밤이 하염없이 깊어지고 있다.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