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3일 제주도 한라체육관에서 제5회 제주도지사배 한.중.일 3개국 프로복싱 국가대항전이 펼쳐졌다. 새천년 10월 제주에서 벌어진 제81회 전국체전에 서울대표팀 코칭스탭으로 참관한 후 22년 만에 이번 대회 해설자로 참관한 박종팔 챔프와 동행 제주도 땅을 밟은 것이다. 2박 3일간 제주도에 머물면서 수년 전 사업 관계로 이 지역에 정착한 전 복싱 국가대표 진행범 선배를 호텔에서 만났다. 마침 동행한 전 WBA 슈퍼 미들급 챔피언 박종팔 챔프와 진행범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전남 무안 출신이어서 반가움은 배가 되었다. 필자가 한국복싱 백년사를 훑어보면 유독 호남지방엔 복싱선수들이 많이 출현(出現) 했다. 

진행범과 박종팔, 대한민국의 권투선수. 한국 복싱계의 전설이자, 1970~80년대 한국 권투 중량급을 제패한 하드펀처였다.

세계챔피언 탄생

한국 프로복싱은 1965년 12월 4일 서강일이 첫 세계타이틀 도전의 서곡을 울린후 지금까지 43명의 세계챔피언이 탄생했다. 그중 해방 후 여수에 정착한 김기수를 시발(始發)로 박종팔 정종관 최창호 박찬영 최요삼 이형철 정비원 김용강 문성길 백인철 박영균 조인주 장태일 등 13명의 챔프가 이 지역에서 탄생했고 아마츄어로 눈을 돌리면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인 신준섭(남원) 김광선(군산) 투톱을 필두로 유종만 황충재 김동길 허영모 전칠성 문성길 오광수 송경섭 박형옥 이남의 주항선 박기철 권현규 장성호 이현주 진행범 김의진 이창환 조인주 홍성식등 7.80년대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복서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1984년 LA.올림픽 선발전에서 김기택을 꺽고 우승한 진행범 우측

왜 이렇게 호남지역에서 다수의 복서들이 탄생했을까? 하는 의구심은 오래전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읽으면서 해답을 찾을수 있었다. 고구려 초기 수도인 국내성의 지형은 산골짜기 속에 위치한 작은 평지로 좋은 밭이 없었다. 밭을 갈아봐야 수확이 충분치 못해 고구려 백성들은 늘 배고프고 굶주렸다. 가구 수는 3만 호에 달했지만 먹을 것이 부족하니 소식하는 것이 풍습이 되어버렸다. 또 산과 계곡은 많지만 벌판과 호수가 없으며 산과 골짜기를 따라 계곡물을 마시면서 허기를 달랬다. 결국 배고픈 백성들은 그 무서운 헝그리(Hungry) 정신을 무기로 대륙의 곡창지대(요동)를 노린다. 란 내용이다. 

1985년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진행범 우측

지독한 가난과 피폐함 속에서 복싱이 유일한 희망

마찬 가지로 70년대 한국은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지만 호남지역은 농림어업(農林漁業)을 탈피하지 못해 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독한 가난과 피폐함 속에서 살았다. 1971년 당시 동양 미들급 챔피언 유제두가 이금택과 1차방어전에서 KO승을 거두고 받은 파이트머니가 <백만원> 이었다. 당시 백만원이면 마포에 18평 APT를 살수 있는 큰돈이었다, 1970년 전태일 열사가 재단사가 되면서 받은 월급이 2만 3천 원임을 상기시키면 당시 돈 백만 원은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이고장 배고픈 청년들이 헝그리(Hungry) 정신을 무기로 두 주먹으로 세계정상을 노려 인생역전을 시도하는 과정과 <삼국지 위서 동이전> 내용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번주 연재되는 컬럼의 주인공 진행범도 1961년 3월 9일 전남 무안태생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진학의 꿈을 접고 만다. 지독한 가난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진학의 길을 열어준 것이 바로 복싱이었다. 1979년 어느날 광주체육관에 입문 천부적인 체력과 성실함이 톱니 바퀴 처럼 잘 맞물리면서 이재화 관장의 지도를 받고 한뼘씩 성장을 한다. 그리고 1년 후 그는 동기생보다 3년 늦은 1980년 영산포 상고에 복싱 특기생으로 입학한다. 2학년 때인 1981년 3월 제13회 학생 신인선수권 대회(페더급)와 제11회 대통령배 대회를 1982년 라이트급으로 월장 제32회 학생선수권과 제63회 전국체전을 석권한다. 1983년 22살에 한국체대에 진학 국가대표로 발탁된 그는 국제무대로 눈을 돌린다. 그해 첫 출전 한 제6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대회에서 미국 대표인 크로프로를 판정으로 잡고 결승에 올라 난적 소련의 글라세프와 맞대결한다. 초반엔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2회 중반부터 체력이 소진된 상대의 길목을 차단하고 탱크처럼 몰면서 회심의 일격을 강타 KO승을 거두며 최우수복서에 뽑힌다. 이때 외신 기자들은 그에게 <인간 기관차>라는 닉네임(nick name)을 선물한다. 이때 진행범은 피지컬 메카닉등 여러방면 에서 포텐이 터지면서 한.미 국가대항전. 킹스컵. 아시아 챌린져 대회를 휩쓸며 국제대회 4관왕을 달성한다.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최우수 복서 진행범  좌측

그해 전국체전에서 백승영(용인대)을 잡고 전국체전 2연패를 달성한다. 1984년 LA 올림픽 선발전이 열렸다. 진행범은 최종결승에서 김기택(수원대)을 군말 없는 판정으로 잡고 올림픽 티켓을 획득한다. 그러나 협회에서 취약체급이란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재 평가전을 펼쳐 김기택에 3연패(2KO)를 당한 전칠성에 1ㅡ4로 패해 올림픽호 승선이 좌절된다. 대한복싱협회의 장난질에 희생양이 되어버린 것이다. 1985년 서울 월드컵 대회에 국가대표로 승선 전열을 재정비한 그는 그해 방콕에서 벌어진 제12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선발전에 LW급으로 출전 전진철(원광대)과 대결에서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 판정에 고배를 마시자 당시 신문에 <불운의 아이콘> 진행범 탈락이란 기사가 실렸다. 결국 147전 139승(97KO) 8패의 화려한 전적을 남기고 1987년 3월 대학 졸업과 함께 복싱을 접는다. 이후 전남체육회 순회코치 서울 석관고 복싱팀을 맡았지만 접는다. 2년 후 진행범은 결혼과 함께 인생 3막에 본격적인 시동(始動)을 걸고 새 출발을 한다. 그에 인생 3막의 서곡은 피와 눈물 과 땀으로 얼룩진 한편의 모노 드라마(monodrama)였다. <인테리어 업계>에 투신 밑바닥에서 강철같은 의지와 신념으로 자갈밭 같은 자신의 인생을 옥토(沃土)밭으로 일궈내며 홀로서기에 성공한다. 현재 그는 10여 년 전에 의정부와 이곳 제주도에 2채의 건물을 매입하여 건물주가 되었다. 형설지공이란 (螢雪之功)이란 단어는 진행범 그에게 딱 어울리는 고사성어 같다.

진행범 전 권투 선수의 운영한 사업체

올해 62세의 진행범은 1년에 절반은 자택이 있는 상계동에서 지내고 6개월은 제주도에서 보낸다. 사업체는 오래전 사위에게 물려주고 제주도에서 그가 하는 일은 오전에 5km 해안가 올레길에서 지난 인생길을 추억하며 뚜벅뚜벅 걸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오후 엔 낚시를 하면서 해변가의 풍광을 음미하며 평온하게 지낸다. 그리고 가끔씩 오래전 제주도에 정착한 필자의 40년 지기인 1982년 제10회 아시아선수권 대회 LM 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의진(군산대)등 지인들과 소줏잔 을 기울이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런 그에게 이곳은 파라다이스 무릉도원 별천지인 편안한 휴식처다.

진행범과 1982년 아시아 선수권 금메달 김의진

인디언들은 기우제를 지내면 꼭 비가 온다. 왜냐면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다. 인디언 기우제는 포기하지 않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 결국 성공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진행범은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는 그런 자세로 인생을 살았다. 현재 그는 속세를 떠나 이곳 제주도 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살고 있다. 맨손으로 시작 무에서 유를 창출 모든 복싱인의 모범 표본(模範 標本)을 보인 진행범 선배의 건승을 바란다.

조영섭기자는 복싱 전문기자로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현재는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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