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일 작가] 참사의 이름은 기록되어야만 한다. 

참사는 사회적으로 억울한 죽음을 의미한다. 또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책임을 묻는 것이다. 따라서 참사의 희생자들은 역사로 기록되어야 함은 마땅하다. 그래야만 책임을 묻고 후대에 기억되어진다. 희생자들의 죽음이 역사에 기록된다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진다는 의미다. 

죽음이 기록되지 않는다면 그 죽음은 그저 개인의 일, 유가족의 일로 사적인 것이 되지만 기록된다는 것은 국가의 책임과 의무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자식의 죽음이, 가족원의 죽음이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 유가족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가 그들의 죽음을 이용하기 때문에 더 불편해진 것이다. 

억울한 죽음, 정부의 책임이 부재해서 발생한 죽음은 기록되어져 왔다. 총기난사, 테러, 안전대책이 미흡한 교통사고, 부실공사 건물붕괴 참사, 우리가 참사라고 누군가의 책임이 결여되었던 죽음에 대해 우리는 기록해왔다. ‘유가족의 동의’를 구했다거나 ‘2차 피해’ 또는 ‘2차 가해’ 우려 같은 이야기는 거론된 적이 없다. 적어도 참사에 대해서라면 말이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주도한 '10.29 참사(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위한 추모 미사’가 14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서울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렸다. 이날 미사에서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했다. 그동안 모든 참사에서는 희생자·부상자 명단은 물론 어느 병원에 있는지도 빠짐없이 공개한 바 있는데, 윤석열 정부는 희생자·부상자 명단을 철저히 숨기고 있으며 국민의힘에선 명단 공개를 패륜이라고 강변하는 중이다. 사진=빨간아재 유튜브 영상 중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주도한 '10.29 참사(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위한 추모 미사’가 14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서울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렸다. 이날 미사에서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했다. 그동안 모든 참사에서는 희생자·부상자 명단은 물론 어느 병원에 있는지도 빠짐없이 공개한 바 있는데, 윤석열 정부는 희생자·부상자 명단을 철저히 숨기고 있으며 국민의힘에선 명단 공개를 패륜이라고 강변하는 중이다. 사진=빨간아재 유튜브 영상 중

그런데, 유독 이태원참사 희생자 명단 공개를 두고 ‘유가족의 동의’를 구했냐느니 ‘2차 피해’가 우려된다느니 등 갑론을박이다. 물론 유가족의 동의를 구하는 것은 기본이다. 밝히기 싫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태원참사는 성격이 달랐다. 정치적 사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번 희생자 명단 공개를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왜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 기록에 대해서는 이토록 시끄러울까. 죽음을 가볍게 여기려는 의도가 다분한 지극히 정치화된 이유가 크다.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이태원참사 희생자들을 그저 단순히 놀러 갔다가 사망한 망자로 바라보는 관점이 많다. 놀라운 일이다. 

당초 윤석열 정부에서 ‘이태원 사고’라고, ‘사망자’라고 명명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고여야만 정부의 책임이 줄어든다. 그렇다. 참사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책임을 전제로 한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공개를 두고 히스테리적 반응을 보이는 정부 여당과 정치권의 태도는 바로 이태원 참사를 단순한 사고사, 하필이면 그 곳으로 놀러간 청년들의 잘못으로 바라보는 시선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를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고, 그저 놀러가서 불행하게 죽은 거라 생각한다면 기록하지 않아도 된다. 예상됐던 인파에도 불구하고 안전관리가 전혀 없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그곳엔 국가가 없었다. ‘사고’는 이내 ‘참사’가 됐고 ‘사망’은 ‘희생’으로 정정됐다. 

억울한 죽음을 기록한다는 것은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망에 국가의 책임이 있었음을 상기하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희생자 이름을 기억케 하는 것은 우리 모두 그저 ‘불특정 다수’의 죽음으로 보지 않고, 소중한 개인들의 희생으로 보려는 의미가 크다. 애당초 정치가 개입할 여지가 없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문제는 희생자 명단공개를 놓고 시끄러운 이유는 정치가 개입됐기 때문이다. 참사를 사망이라고 축소하려는 그래서 책임을 덜어내려는 이들과 그 곳에 국가가 없었다며 국가를 자처하는 이들, 그리고 그들 양쪽에 스며있는 오염된 정치가 보인다. 그래서 ‘유가족의 동의’ 여부는 대개 위선의 언술이기도 하다. 

조경일 작가
조경일 작가

어떤 묘비에 이름 석 자가 없으면 그저 아무개의 죽음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하지만 묘비의 이름 석 자는 곧 죽음의 사연을 담는 것이기도 하다. 대개 이름 없는 죽음은 그 원인이나 책임이 있는 자들이 죽음의 의미를 축소하기 위해 가리는 경우가 많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사망을 온전히 배웅했다면 명단공개를 놓고 이토록 입에 오르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1차적 책임은 참사를 막지 못하고 희생자들을 배웅하지 못한 국가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명단공개를 놓고 ‘죽음에 대한 예의‘라던가 하는 말들은 애초에 그들의 죽음에 예의를 부여하지 않았던 국가의 탓을 가려버릴 뿐이다. 위선의 입들은 평가를 그만하고, 청년들의 넋을 빨리 잘 보내주고, 정부는 책임지고 향후 대책을 잘 마련해야 한다. 꼭 그래야만 한다. 

참사 이후에도 정치가 실종됐음을 목격한다. 어쩌면 위선의 입들에 기대는 매일이 참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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