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명한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나는 일.

고사성어(고사성어(故事成語)에 ‘풍운지회(風雲之會)’라는 말이 있습니다. 《역경(易經)》 <문언전(文言傳)>에 나오는 말로, 용이 구름을 타고 범이 바람을 만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영웅호걸(英雄豪傑)이 시기를 타서 큰 뜻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공자(孔子)께서 “날아다니는 용이 훌륭한 사람을 보면 좋다(飛龍在天 利見大人)./ 용이 가는 데 구름 가고 범 가는 데 바람이 따른다(雲從龍風從虎)/ 이같이 성인이 나오면 만물이 우러러 그 덕을 보게 된다(聖人作而萬物覩).”라고 해석하셨습니다.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우리도 풍운지회의 멋진 인연을 가지셨는지요? 그렇습니다. 그 풍운지회의 한 분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념 인물>로 선정된 분이, 바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1762~1836)이십니다.

유네스코는 2012년에 세계 기념 인물로 네 사람, 루소, 헤르만 헤세, 드뷔시, 정약용을 선정하였지요.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ㆍ1681~1763) 선생의 유고집을 읽고, 실학에 꿈을 키운 정약용 선생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 하나로 강진 유배지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자기를 모함한 몇 사람에 대해서 만 불편한 얘기를 조금 했을 뿐, 나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평생을 나라 걱정, 백성 걱정으로, 관료들의 부패를 척결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다산은 500 여권에 달하는 저술을 통해 정치, 행정, 법학, 경제, 지리, 의학, 공학 등을 아우르며, 철저한 실학사상(實學思想)을 펼친 실사구시(實事求是) 철학자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과거(過擧)로 초시(初試)는 1,000명, 진사(進士)는 200명을 합격시켰는데, 다산은 22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진사 합격자는 임금님께 인사를 드리는데, 조선왕조 최고의 대학자였던 정조(正祖)는 다산의 주관식 논문을 읽고 인재로 키워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조와 처음 만남이 이루어지던 날 정조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 이름이 무어냐?” “네! 정약용입니다.” “나이가 몇이냐?” “22살입니다.” “알았다.” 이 첫 만남을 다산의 기록에 <풍운지회(風雲之會)>라 하였습니다. 정조는 성균관 학생들에게 수시로 시험을 치렀는데, 다산이 계속 장원을 하자 감탄하여 학생인 다산을 수시로 불러 국가 정책에 대해, 물어보았고, 다산이 올린 정책 여러 개가 국정에 반영되기도 했습니다.

6년 간의 성균관 공부를 마치고, 28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 길에 들어선 첫날 시(詩)를 지었는데, 공직자로서 ‘공렴(公廉)’이란 두 글자를 마음속에 다짐한 것이었습니다. 이 다짐을 평생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산은 33세에 암행어사로 경기 북부 4개 고을을 암행 감찰하였는데, 농촌 백성들의 황폐하고 비참한 생활과 관료들의 부패에 충격을 받고, 이대로 두고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정조는 다산 선생이 30세 때, 앞으로 10년을 계획하고 수원 화성(華城) 건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다산은, 화성 설계를 하면서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발명하였으며, 거중기 11대를 투입해 2년 4개월 만에 성을 완공하였으니, 정조가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산의 유일한 배경이었던 정조가 서거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 한 후, 노론이 정권을 집권하면서, 선생은 생애 최대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천주교 탄압에 연루되어 40세에 유배형을 받았던 것입니다. 1801년 11월 하순 나주 율정점(栗亭店)에서 정약전, 정약용 두 형제는 기약 없이 눈물로 생 이별을 했습니다. 둘째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각각 유배를 떠났지요.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동문 밖 주막에 들려 주모한테 어려운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높은 양반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는 모르겠는데 죄가 밉지, 사람이 밉겠소. 방이 하나 있는데 먹여주고 재워줄 테니 내 부탁을 들어줄래요.”

“말씀 해 보세요.” “당신은 암행어사까지 하신 분이라 배움이 많을 것인데, 우리 동네 아이들이 배우고 싶어도 선생님이 없어서 배울 수가 없소. 공부를 가르쳐 주겠소?” “다른 건 몰라도 그거라면 하겠소.” 선생은 흔쾌히 허락하고 골방에서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정치한다고 책도 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마음껏 책도 보고 글도 써야 하겠구나, 하늘이 내게 내린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선생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암행어사 시절 관료들의 부패에 고통받는 백성들의 황폐하고 비참한 현실을 보았고, 유배지 강진 고을에서도 ‘홍안애명(鴻雁哀鳴)’의 슬픈 현실을 지켜보았습니다.

선생은 목민관들의 마음 자세가 이런 상태라면 나라가 망할 것이며, 개혁을 하지 않으면 국가와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목민심서(牧民心書) 48권 16 책’ ‘흠흠신서(欽欽新書) 30권 10 책’ ‘경세유표(經世遺表) 필사본 44권 15 책’ 등등, 무려 500 여 권의 책을 저술하여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는 길을 제시 했습니다.

올해 다산 정약용 선생의 탄신 260주년이라고 합니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봅니다. 지금 나라가 너무 어렵습니다. 우리 다산의 큰 유업과 위대한 실학 정신을 지금 이 땅에 펼쳐보면 어떨까요!

단기 4355년, 불기 2566년, 서기 2022년, 원기 107년 12월 5일

덕산 김덕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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