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권 논설위원장

요즘 세상에 행복감을 누리려면 스스로 ‘삶의 패턴’을 바꾸려고 의식적으로 생각을 달리하며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과 같은 한국 사회문화체계에 휩쓸려가면서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행복을 한 톨이라도 얻을 수가 없다.

그것은 구조적으로 한국사회가 긍정을 느낄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지 않아서다. 그래서 한국의 행복지수는 항상 최하위를 맴돌고 있다. '어제 편안하게 쉬었는가?', '어제 존중을 받아보았는가?', '어제 많이 미소를 짓고 많이 웃었는가?', '어제 재미있게 일을 했는가?', '어제 즐거운 일이 많았는가?".

거창하게 말해 긍정경험지표이지만 들여다보면 평범한 일상에서 느끼고 싶거나 체험하고픈 감정이다. 실제 누구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들이다. 이 질문들에 ‘예’라고 답변을 하게 되면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긍정지수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인들에게는 결국 ‘아니요’라는 대답이 더 많다는 얘기다. 한국인의 삶이 얼마나 메마르며 팍팍한지를 알 수 있는 통계다. 이것은 지나친 줄 세우기식 ‘경쟁주의’와 ‘비교우월주의’ 행태 때문이다.

미국에 지식공유 사이트 '퀘라'(Quora)가 있다. 세계의 지식을 나누며 키워가는 온라인 공동체다. 여기에 보면 한국에서 오래 동안 거주했던 샌티에고 핀토라는 사람은 한국문화를 관찰하고 체험한 느낌을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올리고 있다.

"한국사회는 사람을 평가할 때 기술이나 개인의 가치는 차치하고 무엇보다 먼저 연배와 사회적 지위를 중시한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여러 가지 학위를 받으려고 혈안이 돼 있다. 깊이 있는 지식을 갖추려고 하기보다 이런저런 자격 갖추기에 급급하다. 이력을 쌓아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애쓴다.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들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할까에 집착을 하는 것이다.

통상 나이든 사람들이나 윗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보스 행세를 하려고 한다. 또 언제나 자신들이 권한을 쥐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한다. 직업에서 자신이 실력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왜냐하면 서열과 사회적 위치와 다른 시시한 요소들이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한국생활에서 지켜본 것은 한 마디로 ‘어떠한 것을 정도에 지나치게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 곧 탐욕이 아니었을까? 탐욕은 내면적으로 결핍을 느끼는 심리상태에서 나타난다. 물질이 부족해서라기보다 마음이 채워져 있지 않아 그 공허감을 메우기 위해 욕심을 내게 되는 것이다. 지나친 경쟁에 뛰어 드는 것도 일종의 욕심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 한다”는 속담은 이기주의적 심상(心相)을 표현한 것이다. 남을 생각하기보다는 자기의 이익만을 챙기는 풍조를 가리킨다.

탐욕이 지배하는 사회는 안정성이 부족하며 남을 배려하는 자세가 희박하게 되어 있다. 우선 내 것부터 챙기고 봐야 하는 세상 추세에 과시욕과 허영심이 넘쳐난다. 진정으로 성공을 이루고 행복을 찾는 길은 제로섬 게임이 아닌 서로가 윈-윈 할 수 있는 포지티브섬 인생전략인 것이다. 플라톤과 키케로의 고대 세계에서 근대 세계를 열려고 했던 유럽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 그들이 갈망했던 토머스 모어의 ‘행복도시’(Eu-topia)에서는 이런 것들을 악덕으로 여겼다.

토머스 모어가 꿈꿨던 『유토피아』의 사회는 어떠했을까?

"모든 생필품이 충분히 넘쳐나고 어떤 사람이 필요 이상 많은 것을 요구할 이유가 없으니 말입니다. 어떤 생필품이 부족하게 되는 사태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고 할 때 누가 왜 공연히 필요 이상으로 가져가겠습니까? 결핍에 대한 공포가 모든 동물들에게 욕심 내지 과욕을 야기한다지만 그 외에도 인간은 비뚤어진 명예심 때문에 물욕을 보이며, 남들보다 많이 가지고 있음을 내세워 우쭐거리려는 허영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악덕이 유토피아의 사회제도 안에 자리 잡을 여지가 없습니다."            -토머스 모어 저 김남우 옮김 『유토피아』에서-

역시 당대의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는 토마스 모어를 ‘사계절의 인물’(omnium horarum homo)이라 불렀다. 그것은 당시 왕정 시대에 정의를 부르짖다 정치적 박해를 당한 토마스 모어였지만 존경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토마스 모어를 부드럽고 상냥하면서도 때로는 즐겁고 유쾌하고 때로는 심각하고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적고 있다. 분명 토마스 무어는 성공하는 인생의 성품을 지녔다고 여겨진다. 그러니까 그런 공정한 행복사회를 외치지 않았을까?

물론 토마스 모어가 설정한 유토피아는 환상의 샹그릴라다. 그가 오직했으면 중세 유럽의 불평등과 불공정의 사회를 보며 이런 이상향의 사회를 문학작품으로 그렸을까 헤아려진다. 그의 참여론에 따르면 ‘선한 의지의 사람들이 책임을 저버릴 때 악한 의지의 사람들이 승리 한다’는 것이 요즘의 한국사회를 나타내는 말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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