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사

며칠 전 3월 21일이 ‘세계시의 날(World Poetry Day)’이었습니다. 이 시(詩)의 날은 언어의 다양성 확보, 인간의 내면 정화(淨化), 청소년 교육, 문화 교류의 수단 등, 시의 다양한 역할을 알리고 시를 보호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1999년 제30회 총회에서 제정한 날입니다.

‘세계시의 날’ 제정을 위한 유네스코 결의안에 따르면 시는「첫째, 소멸하는 언어를 활용함으로써 언어 다양성을 보존하는 데에 기여하며, 둘째, 언어의 사회화 기능과 구전 가치를 갖고 있어 청소년 교육에 도움이 되고, 셋째, 전 세계 문화 교류에 이바지한다.」라고 시의 중요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저 역시 잘 쓰지는 못하지만 <대불의 꿈> <덕화만발> <불멸의 꽃> 등 세 권의 시집을 낸 시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릇 시인이란 마음에 삿(邪)됨이 없어야 합니다. 즉, 공자가 말씀하신 ‘사무사(思無邪)’인 것이지요.

사무사는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음을 말합니다. 공자가 시 305편을 산정(刪定)한 후 하신 말씀으로 사(思)는 ‘생각’을 말하고, 무사(無邪)는 ‘사악함이 없음’을 뜻한다 했습니다. 즉, 사악함이 없는 생각을 의미하는 말로, 마음이 올바르고, 조금도 그릇됨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시삼백 일언이폐지왈 사무사(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그러니까《시경(詩經)》에 있는 삼백 편(三百篇)의 시(詩)는 한 마디로 말해 사악(邪惡)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시란 과거나 현재나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감정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공자(孔子)께서《시경(詩經)》에 나와 있는 시(詩) 300편을 모두 읽어보니, 그 내용들은 조금도 이해타산을 따지는 내용도 없고, 속된 내용도 없으며, 오직 인간이 올바로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군더더기가 없고, 사특함이 없는 동심의 마음이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에 ‘사(邪)’가 끼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원래 ‘사무사’는《시경》의 정신인 사실(事實)과 감정(感情)의 순화(純化)를 상징합니다. 그러한 뜻에서 공자는 3백편의《시경》을 한마디로 간추려 사무사(思無邪)라 하신 것이지요.

‘사무사’는 공자사상의 ‘인(仁)’에 버금가는 한축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이라서 순수하지 않은 사악(邪惡)한 마음을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대한다면 건설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무사’라는 말은 사랑에는 삿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생각하고 사랑함에 있어서 그 사람을 이용한다거나 음흉(陰凶)한 생각을 품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지요. 그 생각에 삿됨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함에 가져야할 마음가짐이 아닌지요? 

현재 매달 많은 문예지(文藝誌)와 동인지(同人誌)들을 통해 수천 편의 시(詩)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시인의 수가 얼마나 될까요? 아마 수천 명에 이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매월 한 편씩만 시를 써도 이 세상에 삿됨이 없어질 것인데 요즘 문인사회가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저 역시 이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지금 ‘# Me Too’ 광풍에 휩싸여 많은 문인들이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를 크게 놀라게 한 고은 시인은 저 역시 존경해 안성 자택까지 드나들던 관계를 유지했었습니다. 지금 어디로 잠적했는지 보이지 않는 극작가 오태석은 오래된 저의 친구입니다. 또 무려 17명의 ‘미 투’ 운동에 연루되어 구속된 이윤택 단장은 연극계의 대부(代父)라고 합니다.

평소 누구나 존경하던 이런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왜 이런 무참한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사무사’의 정신은 배우지 않고 기교만 키워 왔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의 자유시라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런 규제도 없습니다. 극단적인 표현을 쓴다면 비문(非文)도 시로 행세하는 곤란한 세상이 되고 말았지요.

말하자면 시의 무정부상태라고나 할까요?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시라는 이름으로 쓴 글은 다 시라고 불러줘야만 되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시처럼 쓰기 쉬운 글이 없게 되었습니다. 가장 정련(精練)된 문학의 양식(樣式)으로 신성시되던 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다 마음에 사심(邪心)을 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에 공자(孔子)가 다시 있어 한국의 이 어지러운 문단(文壇)을 한탄하면서 새로운《시경》을 엮는다면 어떤 기준으로 작품들을 선별할지 사뭇 걱정이 됩니다. 역시 ‘사무사(思無邪)’ 라고 호통을 치실 것만 같습니다.

의롭고 착하고 사가 없는 사람들은 늘 핍박과 소외 속에서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롭지 못하고 사특한 세력들은 온갖 기득권을 독점한 채, 늘 물질적 풍요와 쾌락을 누리며 떵떵 거리는 세상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 쥐꼬리만한 권력을 휘두르며 입에 담지 못할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는 현실입니다. 극히 일부이지만 그들을 보노라면 구역질이 나다가도 측은한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공자가 자신의 아들을 가르칠 때 ‘시경을 공부할 것’을 요구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공자의 문하생인 진항(陳亢)이 공자의 아들 백어에게 “선생님께선 그대에게만은 우리들한테 하신 말씀과는 다른 무슨 특별한 것을 들려주시지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김 덕 권(길호) 합장

이에 백어가 대답하길, “여태껏 이렇다 할 특별한 가르침을 따로 받은 적은 없습니다. 다만 언젠가 아버님이 홀로 계실 때, 제가 황급히 뜰을 가로지르려 하자 저를 불러 세우시고는 너는《시경》을 읽었느냐, 하시기에 아직 안 배웠다고 말씀드렸더니,《시경》을 배우지 않은 인간은 말상대가 안 된다고 꾸짖었습니다.”

공자께서 자식에게《시경》을 공부하게 한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사무사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이제부터 이 나라의 시인묵객들은 기교만 배우지 말고 사무사의 정신부터 배우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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