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 칼럼니스트

무선무악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되지 않는 것의 하나는 창세기 첫 부분의 선악과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요? 왜 쓸데없는 선악과를 만들어 인간들에게 태어나자마자 원죄를 뒤집어쓰게 하셨는가요?

대개 사람들은 선악(善惡)의 경계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수행을 하고 있는 스님조차도 그 선악의 경계에 대해 꽤 의심을 품고 있지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자꾸 분별하려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똑바로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대개 악과(惡果)에서 선과(善果)로, 번뇌에서 보리(菩提)로, 중생에서 부처로 가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부처가 말하는 선(禪)의 본질은 ‘선악의 구별이 없고 초월하라’는 데에 있습니다. 이는 선악을 분별하는 것조차 하지 말라는 이치와 같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선과 악을 초월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자연히 악은 멀리하게 되고 선과 가까워진다는 본래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악행을 멀리하고 선행을 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성품(性品)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태어난 그 순간 본래면목(本來面目)인 마음자리가 바로 선(善)이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마음은 쉬이 흔들리는 갈대와도 같습니다. 이렇게 순식간에 변하기 쉬운 마음을 가지고 선악을 구별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무리입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는 선악을 구별해야 하는 것일까요? 스스로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참선(參禪)을 행하는 길이 최선일 것입니다. 참선을 행하게 되면 자기의 주인인 그 마음이 밝아지고 그 밝은 마음으로 인해 선악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학교의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칠판에 <선과 악>이라 써놓고는 강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쌍의 부부가 유람선을 타고 여행을 하다가 큰 폭풍우로 해상재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배의 구조 정에는 자리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남편은 부인을 남겨두고 혼자 구조선에 올랐고 부인은 침몰하는 배 위에서 남편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선생님은 여기까지 얘기하고는 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여러분! 그 상황에서 부인이 남편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요?” 학생들은 모두 격분하여 여기저기에서 떠들며 대답했습니다. “당신을 저주해요. 당신을 남편으로 선택한 내 눈이 삐었지! 어디 얼마나 잘 처먹고 잘 사나봐라.” 이때 선생님 눈에 한 학생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학생에게 다가가 나지막하게 물었습니다.

“그럼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학생은 의외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생각했을 때, 부인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 잘 부탁해요!” 선생님은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너 이 얘기 어디서 들어봤니?” 학생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아니요. 제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선생님은 감격해 하며 다시 강단에 올라 말했습니다.

“정답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습니다. “배는 침몰했고 남편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자녀들을 잘 키웠고, 그 남편도 몇 년 후 병으로 죽었단다. 자녀들이 아빠의 유물을 정리하던 중 아빠의 일기장을 발견하는데, 아빠와 엄마가 배 여행을 갔을 때 이야기가 적혀있었지. 그 때 엄마는 이미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려있어서 세상을 떠나보낼 마지막 위로의 여행중이였단다.”

“그 때 마침 큰 폭풍우를 만나 사고가 발생하였고, 아빠는 자식들을 위해 마지막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버릴 수가 없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빠의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여보 미안하오. 그 때 당신이 나를 등 떠밀지만 안았다면, 나도 당신과 함께 바다 속에서 죽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소. 우리들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자식들 때문에, 당신만 깊고 깊은 차가운 바다 속에 잠들게 밖에 할 수 없었어. 천국에서 당신과 다시 만날 그날만을 고대하며, 당신 몫까지 아이들을 잘 키울게”

이야기를 끝내자, 그렇게 잘 조잘거리던 아이들도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교실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어떻습니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요? 저는 얼마 전부터 아내 보다 제가 먼저 가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품에 안겨 먼저 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요즘 집사람의 상태가 여간 걱정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바꿨습니다. 제가 먼저 간다는 생각은 여간 이기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루라도 제가 늦게 가는 것이 아내의 사랑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몸이 아픈 아내를 두고 제가 먼저 갈 수 없는 것이 저의 양심입니다.

그럼 어느 것이 선이고 어느 것이 악인가요? 선이 없으면 악이 있을 수 없고, 악이 없으면 선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찬 가지로 부처가 없으면 중생(衆生)도 없습니다. 중생이 있기 때문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닌가요? 다시 말하면 선과 악, 부처와 중생은 손의 안팎과 같은 것이어서 결국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선과 악을 나누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心)이 곧 성품이고, 깨달음이며, 부처입니다. 마음이란 형상과 방향과 장소가 없으므로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청정한 그대로 법계(法界)에 두루 하여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며, 본래 완성된 청정한《법신불(法身佛) 사은(四恩 : 天地 父母 同胞 法律)》인 것입니다.

그러면 저 무심한 무선무악(無善無惡)의 심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것은 선악 이전의 마음입니다. 유교에서는 그 경지를 지선(至善)이라 읊었습니다. 이런 상태를 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이라 하고, 기독교에서는 신성(神性)이라 부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불성으로서 또는 신성으로서 지선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호오(好惡)와 선악과 시비(是非)와 증애(憎愛)에 끌림이 없는 경지가 바로 지선입니다. 선을 소유하려고 하면 그것이 나와 남을 괴롭힙니다. 선과 악이 따로 없습니다. 시비선악에 사로잡히지 않는 본래의 그 마음을 지키면 우리에게 선과 악은 따로 없는 것이지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4월 3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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