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민에게 가장 잊지 못하고 잊어서는 안될 사건이 지난 1948년 4월3일에 발생한 이른바 ‘4.3항쟁’이다.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한 4.3추념식에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해 직접 추념사를 했는데, 국가 원수로는 지난 2003년 故노무현 전 대통령이래 두 번째이다. 이날 문 대통령은 생존 희생자와 유족들을 위로하며 “국가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과 노력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리고, 또한 깊이 감사드립니다”라고 공식 사과했다.

이 역시제주4.3사건과 관련해 대통령의 공식 사과는 2003년 10월, 4.3진상보고서가 나온 후 제주를 찾은 노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다. 문 대통령은 "4.3의 완전한 해결의 절반은 정부의 몫이지만 절반은 국회가 할 몫"이라며 "국회와 함께 열심히 해서 끝까지 잘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 정부가 해내지 못하면 다음 정부가 이어갈 것"이라며 "4.3의 완전한 해결은 도민들이 이제 그만 됐다고 할 때까지 해내가겠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오늘 4.3이 새로운 평화와 상생의 미래로 나가자는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추념사에 하고 싶은 말씀을 다 드렸는데 유족과 생존희생자, 도민들에게 정말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한 "4.3의 진실이 똑바로 우뚝서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며 "나아가 4.3의 완전한 해결, 그리고 똑바로 가지는 못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다는 희망을 유족들과 희생자들이 갖는 계기가 되길 바라고 문재인 정부가 책임있게 해나가겠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은 "더 이상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국가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과 노력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리고, 또한 깊이 감사드린다"면서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선언한다"고 했다.

한편 지난해 대선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는 가지 못하지만 내년에는 대통령 자격으로 참석해 제주의 한과 눈물을 함께 나누겠다"고도 밝힌 바 있다. 4.3항쟁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1945년 8월15일 광복 직후 제주도는 6만여 명 귀환인구에 따른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시대 경찰들이 미군정 경찰로 변신한 것, 군정 관리들의 부정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이런 와중에 1947년 3월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서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해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의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고, 이를 틈 타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해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 이어졌다.

미군정은 이 총파업이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지만,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다.

따라서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 등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당시 북한에서 탈북한 청년들로 만들어진 서북청년회(서청)는 테러 등으로 민심을 자극했고,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도 이어졌다. 1948년 3월, 일선 경찰지서에 검거됐던 제주도민 세 명이 고문치사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당시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4월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의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와 남한만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촉구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고, 사태가 악화되자 군대에 진압출동 명령을 내렸다.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의 김익렬 중령은 경찰.서청과 도민의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에 군이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귀순작전을 추진해 4월 말 무장대측 책임자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대동청년단원이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평화협상은 결렬되고, 제9연대장은 교체되었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에 파견하여 5.10 선거를 추진했는데, 5월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선거가 실시됐지만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가운데 두 개 선거구가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제주도가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결국 5.10 선거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를 뛰어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고,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948년 10월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11월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 지대는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이후 11월 중순께부터 이듬 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중산간 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됐고, 아예 마을 자체가 없어지는 구역도 수십 곳으로 늘어났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전개됐는데,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투쟁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하지만 제주의 비극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희생되고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 처분되는 등 계속 이어졌다.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1980년대 이후 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1월에 ‘4.3특별법’(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공포되고, 이에 따라 8월 28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이뤄졌다. 당시 진상조사단의 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됐다. 2011년 1월, 4.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 희생자로 14,032명과 희생자에 대한 유족 31,255명이 결정됐다.

4.3항쟁은 일부 좌익무장단체의 투쟁으로 확산되면서 인명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으나 원인 제공은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에 의한 것이었으며 진압과정에서 군인도 가세하면서 인명.재산 피해는 엄청나게 불어났다.

특히 일반 제주도민들의 희생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아 지금까지도 제주에 깊은 상처로 남은 역사적 사건이다. 2014년, 박근혜 정부에서 제주 4.3항쟁 추념일이 국가지정 기념일로 지정됐다.

당시 안전행정부는 '제주 4·3희생자 추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한다는 입법예고를 했고, 6월 국회 의결을 통과해 민간 차원에서 이뤄지던 4.3 관련 행사가 정부가 주관하는 국가적 행사로 진행되게 됐다.

제주4.3위원회가 2003년부터 정부에 4.3사건 추모기념일을 지정해줄 것을 건의해 11년 만에 성과를 내게 된 것이다. 이런 비극의 역사를 가진 4.3 추념일 70주년을 맞아 국가차원에서 추념식이 진행되고 대통령도 참석해 70년의 갈등을 해소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4.3사태를 좌익 무장폭동이 개시된 날이라고 밝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날 홍 대표는 "제주 4.3 추념식이 열리는 4월 3일은 좌익 무장폭동이 개시된 날"이라며 "제주 양민들이 무고한 죽임을 당한 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홍 대표의 이런 발언은 주요 포털 실검에 오르면서 논란이 확산되는 모습이다. 홍 대표는 페이스북 글을 통해 "4.3 사건을 재조명하고 특별법을 개정할 때 반드시 이 문제도 시정해 무고한 양민이 희생된 날을 추모일로 고쳐야 할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4월 3일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위원장인 김달삼이 350명의 무장 폭도를 이끌고 새벽 2시에 제주경찰서 12곳을 습격했던 날"이라고 지적했다.이어 "(남로당 공격이 자행된) 이날을 제주 양민이 무고하게 희생된 날로 잡아 추념한다는 것은 오히려 좌익 폭동과 상관없는 제주 양민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4.3항쟁 추념식에 홍 대표가 이런 남로당.좌익을 언급하는 것은 6.13지방선거를 앞두고 보수진영 결집을 위한 ‘색깔론’ 공세가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홍 대표는 추념식장에서 취재진들에게 "4.3사건에 대해서 문재인 대통령과 역사 인식은 다르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홍 대표의 주장은 ‘뜬금없다’고 보여진다.홍 대표가 좌익 무장폭동이 개시된 날로 주장한 4.3항쟁 희생자 추념일은 지난 2014년, 박근혜 전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각종 기념일 규정' 개정안에 따라 국가기념일로 지정됐기 때문이다.제주 4.3이 관련 특별법에 따라 ‘1947년 3월∼1948년 4월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된 것을 과연 홍 대표가 알고 발언했는지 의문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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