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뉴스영상캡처[사진 JTBC '뉴스룸']

[뉴스프리존=안데레사 기자]‘무너진 스물세살의 꿈’. 5‧18 민주유공자 김선옥(60)씨가 38년 동안 가슴에 묻고 있던 아픔을 어렵게 꺼내 놨다. 5.18 당시 시위에 참여했다. 상무대에 끌려가 고문수사를 받았던 여성이 수사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38년만에 폭로했다. 

"얼굴이 반반하네”
5.18 당시 시위나 수사 과정에서 여성들이 당했던 피해에 대해 면밀한 조사가 시급해 보입니다. 김씨는 1980년 5‧18 당시 전남대 음악교육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평범한 학생이었다. 5월 22일 책을 사러 시내에 나갔다가 총상을 입은 시체를 본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시위에 참여했다.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맡아 차량통행증과 유류보급증, 외신기자 출입증, 야간통행증 등을 발급하는 일을 맡았다.

시국이 잠잠해질 무렵 교생실습을 나간 그는 그해 7월 3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에게 붙잡혔다. 김씨는 “가니까 ‘여자 대빵 데리고 왔구먼. 얼굴이 반반하네. 데모 안 하게 생긴 년이. 너 이년, 인자 무기징역이다’라고 했다”고 회상했다. 60여일간 고문수사를 받다 석방되기 전날, 수사관에게 끌려가 여관에서 성폭행을 당했다. 

“저항도 못 하고 당했다는 게 더 비참했어요”
폭행과 고문으로 점철된 조사가 끝날 무렵인 9월 4일, 소령 계급을 달고 계장으로 불리던 수사관이 김씨를 차에 태우고 밖으로 나갔다. 수사관은 비빔밥 한 그릇을 사 먹인 후 여관으로 데려가 김씨를 성폭행했다.

김씨는 “그 전에 죽도록 두들겨 맞았던 일보다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 비참했다”며 “고문으로 몸이 만신창이가 돼 있어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했었고, 이후에도 그날의 일은 입 밖에 꺼낼 수도 없었다”고 밝혔다. 그날 이후 자살 기도만 수차례 할 정도로 삶은 치욕스러웠고, 속앓이 끝에 유방암 투병까지 해야 했던 김씨는 '미투 운동'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며 38년만에 입을 열었다.

김씨는 기억조차 하기 싫은 치욕을 당한 후 다음날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김씨의 삶은 산산조각이 났다. 방황하면서 만난 남자와의 사이에서 딸을 임신했다. 수면제를 먹고 목숨을 끊으려 하기도 했다. 김씨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은 뒤 급성 간암으로 세상을 떴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까지 외압 때문에 퇴직하면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교육청에 진정서를 내 83년 3월 ‘5‧18을 들먹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음악 교사 발령이 났다.

그는 5‧18 보상 신청서에 “‘무엇으로, 어떻게 내 인생을 보상하려고요’라는 문구를 넣어 저항 아닌 나름의 저항을 했었다”고 전했다.이번 폭로는 80 년 5월 당시 계엄군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해 정신분열증에 걸렸다고 알려진 여고생의 사례에 이어 수사 과정에서도 성폭행이 있었다는 걸 증언한 드문 구술 자료이다. 보상이 이뤄져 2000만원을 받았지만 허망했다. 김씨는 “세상이 달라져 보상 이야기가 나오고 진실 규명이 진행돼도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여기고 숨죽여 살았다”며 “나는 아직도 1980년 5‧18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김씨의 38년 세월을 담은 사연은 10일부터 5‧18영창특별전에 공개된다.

38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 번도 제대로 말해지지 못했던 5.18 당시 성폭력으로 인한 여성들의 상처 뒤늦은 진상조사가 반드시 규명하고 기록해야 할 5.18 의 역사이다. 23개의 광주 상흔을 담은 방 중 열 번째 ‘진실의 방’에는 한쪽 벽면에 꽃 위로 노란 나비가 날아오르는 그림 위로 김씨의 사연이 담겼다. 꽃과 노란 나비는 김씨가 겪어왔던 고통과 편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세상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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