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소리

그 다음날 아침에도 2층의 화실로 달려갔다. 새벽 다섯 시였다. 애춘은 다시는〈꽃과 나비〉의 산란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녀는 학교의 미술실에서 그렸던 그림들을 모두 쓰레기장에 소각해 버렸다. 꽃과 나비의 입맞춤, 주제 없이 산만하고 달콤한 육욕을 자극하는 그림은 모두 한데 모아 불에 태우기 시작했다. 불타버리는 그림을 바라보면서 애춘은 자신의 모든 과거와 어두운 것들이 사라지는 듯 후련함을 느꼈다.

‘사라져라, 모두….’

이제 화실은 새로운 그림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주제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붓대는 춤을 추었다. 그림은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생명의 흐름 속에 붓대가 움직여져야 한다. 진정 그리고자 하는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리라. 애춘은 그림을 지우듯 지난날의 남편을 지우고 싶었다. 새로운 모습의 남편! 그런데 요즘 채성은 집에 계속 들어오고 있다. 자신의 자살소동 이후 형식적인 책임행위로 여겨졌다. 그것도 한두 번이겠지 했지만 그도 뭔가 달라졌는지 비교적 아홉 시까지는 귀가하는 편이었다. 분명히 그가 자신과 얼굴을 마주쳤을 때도 싸늘한 냉기는 사라지고 온기를 띤 모습으로 다가오는 듯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언젠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채성이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애춘은 인기척을 느끼고 채성인 줄 알면서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채성은 꽃과 나비 따위를 그리지 않고 새로운 주제로 스케치하는 애춘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는 미소를 짓고 화실에서 조용히 내려가곤 했다. 그들에게 오랫동안 막혔던 대화의 문은 좀처럼 쉽게 열리지를 않았다. 그러나 보이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워짐을 교감했다.

현관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벌써 새벽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분명히 열쇠를 가지고 갔을 텐데….’

대문 화상에 남편이 서 있었다. 시니컬한 그의 표정도 사라졌다. 애춘은 경대에서 잠깐 머리를 추스르고 상의에 초록색 니트 가디건을 걸치고 현관 쪽으로 향했다. 12월의 마지막 날인데 정원은 하얀 눈꽃송이로 덮여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채성이 남색 코트에 자주색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어제 회사에 일이 있어 늦게까지 처리 중이라 아침에 잠시 들렀다며 조금 어색하게 말했다. 그는 계속되는 어색함 속에서 거실의 테이블에 가 앉았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기분이 들떠 있었다.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지난날의 그는 아니었다. 진지하며 부드러운 기운이 맴돌았다.

“당신이 그렇게 말이 없으니까 정말 이상하군…. 당신 정말 명랑했잖소!”

“피곤하실 텐데 쉬세요!”

애춘이 뒤돌아서며 자신의 화실로 가려고 했다

“잠깐 앉아요. 중대한 일이니까!”

채성은 간곡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는 무슨 결단이라도 내리려는 듯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죠?”

▲ 자료=네이버 이미지

돌아서며 애춘은 채성과 눈이 마주쳤다. 어색하여 다시 고개를 외면하고 소파에 몸을 던지며 마주침을 피했다. 채성은 그런 애춘의 모습에 상관없다는 듯 조용한 추억을 더듬듯 호주머니에서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었다.

“다름이 아니라. 여기 송문학 박사가 경영하는 모델하우스 창립기념일에 초대장을 보내왔는데 부부가 동행하는 모임이라오. 함께 참석… 했으면 하오!”

말끝을 흐렸다. 매우 어렵게 꺼낸 말이었다.

“미모의 여인 황혜란과 함께 하는 것이 나을 텐데요!”

“혜란은 아주 미국으로 떠났소!”

애춘의 얼굴표정이 변했다

“흥, 둘 다 아주 간단해서 좋군요!”

그러나 혜란이 떠났다는 것은 애춘에게 뜻밖이었다. 채성은 자신의 서류가방을 열었다. 자그마하게 갈색으로 직사각형의 가나초콜릿이 포장되어 있는 봉투를 꺼내었다. 가나초콜릿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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