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주명, 그의 운명은 38년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시작됐다”, “공부벌레에서 시위학생 바뀐 뒤 일관된 민주주의신봉자로 살아와”

“송주명, 그의 운명은

38년 전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부터 시작됐다.”

[뉴스프리존=김은경 기자]올해로 38주년을 맞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송주명 경기교육감 예비후보의 중고교·대학교 동기인 윤영준씨의 육성 회고가 공개됐다.

-다음은 윤영준씨 육성 회고-

“38년 전 송주명과 함께 목포 역 광장에 있었습니다.

저는 목포에 살았던 윤영준입니다.. 우리 송주명 경기도교육감 예비후보와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동깁니다. 출판사에도 함께 잠깐 같이 있었으니, 거의 40년 동안 시간과 추억을 나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1980년 5월에 대한 기억은 아프고 두려웠던 만큼 또렷합니다. 그해 5월 18일은 하필 일요일이었습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저는 다음 날부터 중간고사였기 때문에 일요일인데도 공부를 하러 학교에 나갔습니다.

그때 들은 소식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벌써 광주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전남대 교문 앞에서 대검으로 사람을 찌르고 했다’는 내용의 풍문은 삽시간에 퍼졌고요. 그 상황을 목격한 다음 급하게 목포로 피신했던 사람들이 전했던 소식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교실에도 한 친구가 와서 급하게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깜짝 놀란 저는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오후 4시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쯤 광주에서 버스 한대가 내려왔어요. 그 버스는 광주의 대학생들이 탈취한 버스였어요. 수십 명이 올라탄 그 버스는 유리창이 다 깨져 있었고 학생들이 각목을 들고 창틀을 시끄럽게 두들기면서 목포로 들어왔습니다. 그 버스가 광주에서 난리가 났다고, 시민들은 일어서라고 하면서 목포 시내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 버스는 제가 직접 봤습니다. 그렇게 한 바퀴 돈 버스는 다시 광주로 올라갔죠. 나중에 들어보니, 그 대학생 선배들은 광주에 다다르기 전 중간에 차단됐고, 모두 잡혀 끌려가 많이 맞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버스가 목포를 한 번 뒤집고 간 다음 목포 사람들은 광주의 진상을 알게 됐습니다. 광주와 목포는 원래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 가능했었죠. 경악과 분노에 들끓게 된 목포 시민들은 그날 저녁 바로 들고 일어났습니다. 모든 경찰서와 파출소가 일시에 털렸습니다. 그날 밤부터 목포도 광주와 마찬가지로 시민들이 장악한 무정부도시가 됐습니다. 하루 이틀 새에 목포는 광주와 비슷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죠.

우리는 휴교령이 내린 학교에 모여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때 주명은 ‘우리가 이러고 있어선 안 된다.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고, 우리는 그말에 동의하면서 시위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그때 저는 깜짝 놀랐어요. 주명이는 제가 중학교 때부터 봤지만 정말 바보 같을 정도로 공부만 하는 학생이었어요. 굉장히 착하고 밝았지만 공부벌레다 보니 저 같은 몇몇 친구 말고는 어울리는 일도 거의 없는 그런 친구였단 말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주명이는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다면서 반장도 거의 안 했어요. 제가 반장한 적이 더 많았죠.

그 얌전하고, 공부밖에 몰랐던 주명이가 앞장서서 ‘전두환은 물러나라’ 등 구호를 외치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거의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할까. 그 상황에 완전히 몰입했다고 할까. 그 모습을 보고 제가 굉장히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주명이는 공부만 하는 샌님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거죠. 주명이는 아주 확신에 차서 전두환 정권의 본질을, 그게 독재정권이란 걸 간파한 거죠. 제가 좋아하던 역사는 결국 교과서에 나온 역사고, 당시 군사정권에 의해 왜곡된 현실이 지금 역사로 남은 것 아니겠습니까. 주명이는 평소에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교과서 의 죽은 역사를 뛰어넘어 자신이 처한 현실을 똑똑하게 바라보고,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내공이 없는데 그 한 사건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면서 앞장서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목포 시위의 중심은 우리 목포고등학교 2학년들이었습니다. 목포엔 당시 큰 대학이 없었어요. 목포교대나 목포대학이 있긴 했는데 대학생이 중심을 잡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4.19 때도 그랬지만 고등학생이 훨씬 숫자가 많잖아요. 그래서 고등학생이 시위의 중심이었고, 특히 목포고가 많이 나섰습니다. 고3 선배들은 존경할만한 분들 몇 분 있긴 했죠. 하지만 아무래도 입시 때문에 몇 분 못 나섰고, 1학년 후배들은 아직 뭐가 뭔지 모를 때였어요. 학년이 바로 시작된 지 얼마 안 되는 5월이었잖아요.

그래서 자연스레 고교 2학년이 중심이 됐습니다. 매일 우리 동기들이 수백 명씩 목포고에서 모여서 줄지어 목포역 광장까지 행진했습니다. 걸으면서 구호를 외치고 그랬죠. ‘전두환 물러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등 이런 구호들이요. 거리는 3km가 채 안 됐던 것 같아요. 거기서 몇 시간 동안 시위를 했고, 목포 시내를 돈 다음에 해산했습니다. 거의 매일 순서가 그랬죠.

목포역 앞에도 외신 기자가 여러 명 있었어요. 초반에는 칼빈인지 M1인지 소총 몇 자루도 보였습니다. 누가 몇 발씩 하늘을 향해 총을 쏘기도 했어요. 시위대가 수백 명이고 구경하는 사람들까지 하면 1천여 명쯤 됐습니다. 시위대 중 조금 격렬했던 사람들은 목포 시내 버스도 빼앗아 목포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처음 본 광주에서 온 버스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시위에 참여하라고 막 외치고 그랬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우리에게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저만 하더라도 그 전에는 장래희망이 군인이었습니다. 사관학교에 가서 나중에 장군이 되는 게 꿈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 모든 게 완전히 뒤집혔어요. 인생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그러진 사람들은 수많았고요.

전두환 얼굴이라곤 1979년 박정희 죽은 다음에 보안사령관으로, 그 사건 수사한다고 TV에 나온 걸 본 적 밖에 없었죠.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죠. 하지만 주명이는 전두환 정권이 군부독재 정권이라는 본질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용기 있게 말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무서운 시절이었죠. 선생님들이 시위 나가는 우리보고 ‘몸조심 해라’, ‘너무 튀지 말아라’와 같은 말들을 했어요. 주명이처럼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선 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으니까요. 우리는 그나마 무사했지만, 그날 이후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친구도 숱했던 시절이었었죠.

저에겐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당시 그 자체로도 충격적이었지만, 제가 주명이를 아주 달리 보게 된 사건으로도 남게 됐어요. 이후에도 주명이를 쭉 봐왔습니다. 정말 한결 같은 사람입니다. 거의 사십년 동안 제게 좋은 모습을 일관되게 보여줬습니다. 우리 송 교수가 교육감이 돼서 경기도 교육에 그의 열정과 민주주의에 대한 꿈을 아이들도 함께 가질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어쩌면 38년 전 그날이 오늘의 송주명 교수가 경기도 교육감으로서 출마하게 된 시작점일 것이라고 생각돼 이야기를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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