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원이 ‘일원(一圓)’으로 ‘삼십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곡에 모이는 것’처럼 세상 모든 진리의 중심축

 도추(道樞)

도추(道樞)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장자(莊子)》<제물론편(齊物論篇)>에 나오는 이 말은 ‘도의 지도리’라는 뜻입니다. 지도리는 문을 여닫아도 움직이지 않는 중심축을 말하지요. 지도리는 문이 열리나 닫히나 바뀌는 게 없이 똑같습니다. 문이 열리면 밝으니 좋고, 문이 닫히면 따뜻하니 좋습니다. 열리면 열리는 대로, 닫히면 닫히는 대로 좋은 것이지요. 자기의 중심을 제대로 잡고 있는 모습입니다.

또 지도리는 문과 문틀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시킵니다. 마찬 가지로 물건은 저것이 되지 않는 것이 없고, 또 이것이 되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저것은 저것의 입장만으로는 드러나지 않아도 이것을 통하여 알아보면 곧 저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 역시 저것에 말미암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고 죽음이 있으면 삶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사일여(生死一如)이지요. 또한 옳음으로 말미암아 그릇됨이 있고, 그릇됨으로 말미암아 옳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도의 지도리’ 도추인 것입니다.

도추는 저것과 이것이란 상대적인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 도추가 가장 알맞은 가운데에 들어맞아야만 비로소 무궁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옳음도 역시 무궁한 변화중의 하나이고, 그름도 역시 무궁한 변화 중의 하나인 것이지요.

‘도추’는 노자(老子)의《도덕경(道德經)》11장에서 말하는 “삼십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곡에 모인다.(三十輻共一穀.)”에서의 ‘일곡(一穀)’과 같은 표현입니다. ‘폭(輻)’은 바큇살이고, ‘곡(穀)’은 바큇살이 모이는 수레바퀴의 비어 있는 중심과 같은 뜻입니다. 어느 한쪽에 가까우면 원은 어그러진 타원이 되고 문은 삐거덕거리며 닫히지 않게 되고 말지요.

그럼 그 도의 지도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도란 곧 진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지도리는 바로 원(圓)이라는 얘기입니다. 즉, 하나의 원이 ‘일원(一圓)’으로 ‘삼십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곡에 모이는 것’처럼 세상 모든 진리의 중심축인 것입니다.

그 진리의 중심축인 ‘일원’진리는 어떤 것일까요? 일원(一圓)은 우주 만유의 본원입니다. 그리고 제불(諸佛) 제성(諸聖)의 심인(心印)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지요. 또한 ‘일원’은 대소 유무(大小有無)에 분별이 없는 자리이며, 생멸(生滅) 거래(去來)에 변함이 없는 자리입니다. 또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 명상(言語名相)이 돈공(頓空)한 자리로서 공적 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이 ‘일원’은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十方三界)가 장중(掌中)에 한 구슬같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일원’의 진리는 진공 묘유(眞空妙有)의 조화를 나투며,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無始曠劫)에 은현자재(隱顯自在)하는 것이 곧《일원상(一圓相)》의 진리이지요.

우리가 모든 진리의 중심축인《일원상》의 진리를 알았으면 마땅히 그《일원상》을 신앙을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그《일원상》의 신앙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일원상》의 진리를 우주 만유의 본원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불 제성의 심인으로 믿으며, 일체 중생의 본성으로 믿는 것입니다. 또한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로 믿으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로 믿습니다. 또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로 믿으며,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로 믿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없는 자리에서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는 것을 믿으며,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는 것을 믿습니다. 또 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 자재하는 것을 믿는 것이 곧 일원상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럼 그《일원상》의 수행(修行)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을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圓滿具足)하고 지공 무사(至公無私)한 각자의 마음을 알자는 것입니다. 또한《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양성하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상과 같이 원만 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사용하자는 것이 곧 일원상의 수행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일원의 진리》믿고 수행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공부인의 수행 정도에 따라서 여섯 단계의 법위등급을 단계적으로 수행해서 부처의 인격을 이루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법의 사다리>라고 하고 그 여섯 단계 중 상위 세 가지에 대해 알아봅니다.

첫째, 법강항마위(法强降魔位)입니다.

육근(六根 : 眼耳鼻舌身意)을 응용하여 법마상전을 하되 법이 백전백승하며, 대소 유무의 이치에 걸림이 없으며, 생 · 로 · 병 · 사에 해탈을 얻은 사람의 위입니다.

둘째, 출가위(出家位)입니다.

대소 유무의 이치를 따라 인간의 시비 이해를 건설합니다. 그리고 현재 모든 종교의 교리에 정통하며, 원근 친소와 자타의 국한을 벗어납니다. 또한 일체 생령을 위하여 천신만고(千辛萬苦)와 함지사지(陷地死地)를 당하여도 여한이 없는 사람의 위입니다.

셋째, 대각여래위(大覺如來位)입니다.

대자대비로 일체 생령을 제도하되 만능(萬能)이 겸비하며, 천만 방편으로 수기응변(隨機應變)하여 교화(敎化)하되 대의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화 받는 사람으로서 그 방편을 알지 못하게 하며, 동(動)하여도 분별에 착(着)이 없고, 정(靜)하여도 분별이 절도에 맞는 사람의 위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중생으로 살아 갈 수는 없습니다. ‘도추’, 즉《일원상》의 진리를 알고, 신앙하고 수행하여 불보살의 위에 올라야 되지 않을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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