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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혁명 50주년 단상
  • 박정자 객원 칼럼니스트(상명대 명예교수)
  • 승인 2018.05.27 14:00
  • 수정 2018.05.2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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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짐은 전혀 없었다. 세계적으로 경제는 대호황이었고, 베이비붐 현상으로 거리마다 젊은이가 가득했다. 1965년 프랑스의 젊은 세대 인구수는 25년 전에 비해 50%나 증가했다. 같은 기간 총 인구 수가 25% 증가한 것에 비하면 놀라운 수치였다. 사람들은 온통 청춘을 찬양했다. ‘젊은 프랑스’, ‘젊음을 만끽하라’, ‘무조건 젊어야 돼!’ 모든 신문과 잡지의 페이지들을 연일 장식했던 문구였다. “젊은이들은 생각이 깊어. 우리 세대보다 공부도 많이 했고. 아마 우리보다 훨씬 더 잘할 거야.” 나이 든 사람들이 늘상 주고받던 말이었다. 마치 젊음이 덕성과 동의어라도 된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유난스레 연장자를 존경하고 위계질서를 존중하던 나라에서 이런 현상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새로운 세대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과묵하고 수줍은 젊은이들이었다.

1968년 5월 어느 날 갑자기 혁명이 터졌다. 과격한 구호를 외치며 바리케이드 위에 올라 선 젊은이들은 이때까지 어른들이 알고 있던 프랑스 젊은이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슬로건의 문구도 특이했다. "행동하라", "더 많이 소비하라, 더 빨리 죽으리니", "일하지 말라", "열정을 해방하라",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파괴는 창조의 열정", "사랑할수록 더 많이 혁명한다", "배고픈 건 참을 수 있어도 따분한 건 못 참아", "선거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니, 투쟁을 계속할 뿐", “보도블록 밑에는 해변의 모래가...”.

많은 어른들이 공포에 떨었다. 혁명이란 원래 경제적으로 빈곤하고 사회적으로 억압 받는 하층민들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파업에서부터 국가권력 장악에 이르는 일련의 전개가 전통적 의미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대호황이던 시기에, 더군다나 경제적 불만이 전혀 없는 사회 상층 집단에서 급진적 요구가 터져 나온 것이다. 인류가 처음 경험한 역설이었다. 젊은이들은 빈곤에 분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富)의 증대와 경제 성장에 따른 과소비를 문제 삼았다. 잘 살게 되고 소비가 늘어날수록, 다시 말해 경제가 발전할수록 인간성이 황폐화되고, 일상적인 소외가 확대된다는 것이 그들의 기본 개념이었다. 그러므로 인간다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물질에 사람이 종속되는 삶을 거부해야 한다고 그들은 호소했다. 자본주의 경제가 만들어낸 발전 그리고 경제적 진보에 대한 단호한 거부와 소외되지 않은 삶에 대한 열망이 68혁명의 동기였다.

68혁명은 문화 혁명

1968년 3월 어느 날 미국의 월맹(越盟, 북 베트남) 폭격에 항의하여 몇 명의 대학생이 파리 시내 미국 은행을 습격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이때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일부 학생들이 낭테르 대학 학장실을 점거했다. 나중에 독일로 추방된 68 혁명의 투사 다니엘 콩방디(Daniel Cohn Bendit)도 그중 한 명이었다. 점거 6일 만에 낭테르대가 폐쇄되었고, 2개월 뒤인 5월 10일에는 약 2만 명의 학생이 소르본 대학 앞 라틴가(街)를 가득 메웠다.

학생들은 도로에서 보도블록을 파내 경찰에 던지고, 건물을 약탈했으며, 인근에 주차된 차들을 쌓아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화염병이 날고, 자동차 연료 탱크가 불태워지고, 학생들은 추격되고 매 맞고, 300명 이상이 부상했다. 3시간 동안의 격렬한 전투 중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그 후 2주 동안 학생들은 소르본 대학을 다시 점거했고, 노동자들은 각기 자기 공장들을 점거하기 시작했다. 연 인원 천 만 명의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연속적으로 총파업에 돌입하면서 나라 전체가 올 스톱되었다. 노동총동맹(CGT)은 임금의 10% 인상을 담은 '그르넬 협약'을 맺었다. 이처럼 학생과 노동자가 연대했지만 혁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5월 29일, 6시간 동안 잠적했던 드골이 돌아와 라디오 방송으로 국회 해산과 총선을 발표했다. 행적이 묘연하던 6시간 동안 드골은 바덴-바덴의 프랑스군 기지로 날아가 자크 맛쉬(Jacques Massu) 장군을 만났다. 맛쉬 장군이 드골에게 프랑스로 가도록 종용했고, 군의 지지를 확인한 드골은 다음 날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국회 해산과 6월 총선을 약속했다. 시위가 계속될 경우 군대를 개입시킬 수도 있다고 암시했다. 대통령의 라디오 담화가 방송되자 즉각 수십만의 드골 지지 시위대가 샹젤리제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때부터 전세는 역전되었다. 다음 달 실시된 총선에서 드골파 정당이 선거에 승리하여 다시 정권을 잡았다.

이듬해 국민투표에서 패배한 후 드골은 대통령직을 사임했지만, 체제변혁은커녕 정권이 야당으로 넘어가지도 않았다. 조르주 퐁피두와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텡 등 보수 우파 대통령이 계속 집권했고, 1981년 미테랑의 사회당 정권까지에는 13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The 1968 Exhibit 이미지 참조

스튜던트 파워의 시대

그러고 보면 한국의 4.19 혁명도 1960년에 일어났다. 6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민권 운동과 학생 운동이 도시 거리를 휩쓸던 시대였다. 1968년 한 해만 해도 미국의 흑인 인권 지도자 마틴 루터 킹이 피살되었고, 체코 민주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이 구소련의 침공으로 무산되었으며, 미국 대학들에서는 베트남전 반전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다.

왜 하필 60년대에 학생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났는가? 역설적으로 세계적 대호황 덕분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20여 년 간 지속된 평화 속에서 경제를 발전시킨 서방 국가들은 사상 최고의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이때까지 자녀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줄 수 없었던 모든 서민층 가족들이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기 시작했다. 화이트칼라 회사원과 하급 공무원, 자영업자, 농민, 그리고 부유한 숙련노동자들이 그들이었다. 고등교육은 자녀들에게 보다 나은 수입뿐만 아니라 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게 해주는 가장 좋은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반드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종종 부모들이 치른 희생은 대단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60~80년대에 유행하던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말이 바로 그 부모들의 희생을 비유한 신조어다. 대학을 상아탑(象牙塔)에 비유한 서양의 격언을, 소를 팔아 자식을 대학 교육 시키는 한국 부모들의 상황에 대입해 바꿔 치기 한 것이다. 비록 경제적 호황을 누린 서방 세계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60년대 대학생 수의 폭발적 증가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하는 재미있는 비유로 여겨져서인지,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도 『극단의 시대, 20세기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한국의 교육 기적은 소농들이 자신들의 자녀를 명예롭고 특권적인 식자층의 지위로 상승시키기 위해서 팔아버린 암소의 시체들에 기반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소 뼈’의 탑이라는 우골탑을 ‘암소들의 시체’라고 해석한 것이 조금 웃긴다.

한국이건 유럽이건 실제로 대학생들이 사회적, 정치적 주요 세력으로 떠오른 것은 1960년대가 되어서였다. 이것은 대학생 인구 증가와 정비례했다. 프랑스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대학생 수는 10 만 명도 안 되었으나, 1960년에 이르면 20만 명을 넘었고, 그 후 10년 사이에 3배로 늘어 65만 여명이 되었다. 10년 동안 인문과학 전공은 3.5배, 사회과학 전공은 4배로 늘었다. 그리고 68 혁명이 일어났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공생이 늘어나면 사회 불안이 더 커진다는 가설을 세워 볼 수도 있겠다. 한국에서는 유럽보다 20년 늦게 70~80년대에 대학생 수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1975년에 전체 인구의 0.8%이던 대학생 수는 1983년에 이르면 총 인구의 거의 3%로 증가한다. 우리 사회 386의 정치 성향은 이렇게 숫자로 치환된다.

대학생 수가 폭발적으로 많아졌다는 것은 대학생이 더 이상 예외적인 특권이 아님을 의미한다. 과거에 대학생이 누리던 보상은 사라지고, 오히려 양적 팽창에 따른 부실한 교육 환경만이 분개의 대상으로 남았다. 한 종류의 권위에 대한 분개는 다른 종류의 권위에 대한 분개로 쉽게 확대되는 법이다. 결국 대학의 권위에 대한 분개가 학생들을 정치권력에 대한 분개로, 즉 좌파로 기울게 했다.

과거를 기억하고 비교하는 부모들과 자녀들 사이의 세대 차이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부모시대보다 훨씬 더 좋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현재의 시대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시대이기 때문이었다.

변화

사회 변혁이나 체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68혁명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혁명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킨 문화혁명이었다. 격렬한 데모가 이어지던 5월의 2주 동안 나라 전체가 자가 비판 열기에 빠졌다. 중등 교육, 대학, 영화 산업, 연극, 뉴스 미디어의 재편을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회의 구성원들은 주로 개량 사회주의자, 트로츠키스트, 마오이스트, 무정부주의자, 초현실주의자 그리고 마르크시스트들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반(反)자본주의, 반(反)권위주의였다. 특히 후기 자본주의의 과도한 소비와 물신주의, 물질숭배, 인간소외를 질타했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는 강압이나 착취에 의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여론 조작을 통해 부드럽게 인간을 지배하므로 더욱 교활한 권력이라고 했다.

68혁명을 분기점으로 이전과 이후의 시대는 완전히 달라졌다. 교육 제도가 바뀌고, 대학교육이 대중화 되었으며, 엘리트 문화도 대중화되었다. 좌파 일간지 리베라시옹이 창간되었다. 성(性)문제가 공개적 담론의 대상으로 떠올랐고, 영화와 출판물에서 성과 폭력이 일반화되었다. 마약과 환각제가 공공연하게 유통되었으며, 섹스, 마약, 동성애에 대한 모든 금지가 풀렸다. 이성간의 동거가 보편화되고, 피임기구의 판매가 자유롭게 되었다. 성 혁명을 통해 여권이 괄목할만하게 성장하여, 낙태와 피임이 합법화 되고, 의료보험의 대상이 되기까지 했다.

일상적 관습과 인습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전통적으로 권위주의적이던 인간관계가 보다 평등한 인간관계로 바뀌었고, 풀뿌리 민주주의가 고취되었다. 한 마디로 절제와 억압에 기초를 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거부되고, 육체적 쾌락과 성의 자유가 찬양되었으며, 모든 전통적 문화와 공리주의적 가치관이 거부되었다. 여하튼 온 사회에 새로운 가치, 새로운 고민,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삶의 방식이 생겨났다.

그 중에서도 탈 권위, 탈 위계(位階)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었다. 관료적 권위주의가 가장 첨예한 공격의 대상이었는데, 관료주의란 공무원 사회에만 있는 게 아니다. 교사, 교수의 권위주의, 목사의 권위주의, 기업체 사장의 권위주의 등 모든 권위가 전 방위적으로 비판되고 추방되었다. 공장이건, 정치건, 학교건, 언론이건 모든 집단 내에서 수직적 소통방식이 무너지고, 대신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대화에 근거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양식이 자리 잡았다. 세대 간의 관계도 달라졌다. 모든 사람에게 발언권이 주어지고 모두가 함께 토론 했다. 사제 간의 경어 사용도 폐지되었다.

68혁명의 이념은 반-자본주의였지만 동시에 일체의 권위를 거부하는 반-권위주의였기 때문에 아이러니 하게도 1989년 소련의 몰락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억압적 권위주의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막론하고 모든 이념에 들어있는 필연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68을 거꾸로 읽으면 89가 된다는 우스개 이야기도 나왔다.

자본주의의 힘

68혁명은 산업, 학교, 가족이라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세 기둥과 맞서 싸웠다. 그 결과 세 영역은 모두 후기 산업사회 단계로 이행하였다. 산업 노동은 아웃소싱으로 대체되었고, 포드주의적 대량 생산 체계는 포스트-포드주의적(post-fordist) 체계로 바뀌었다. 직장내에서의 수직적 의사 결정은 반(反)-위계(位階)적 상호 소통의 팀워크로 재편되었다. 보편적 공교육은 지속적으로 사교육에 의해 대체되고 있고, 전통적 가족은 해체되면서 1인 가구 혹은 다양한 형태의 성적(性的) 배열이 들어서고 있다.

그러나 좌파는 패배했다. 68혁명 세대는 반자본주의를 부르짖었지만 결국 자본주의가 승리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는 모든 이념과 운동을 흡수하여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일종의 영구 혁명의 능력이다. 자본주의의 기본 장치인 시장이 벌써 교육, 안보 같은, 이전까지 국가의 특권적인 영역이었던 곳까지 침투해 들어가고 있다. 고용 불안은 ‘선택의 자유’라는 장점으로 전환되고 있다. 좋은 직장을 선뜻 버리고 산티아고 순례 여행을 떠나는 20~30대 젊은 여성들은 다음 몇 년간 안정적 직업이 없게 될지 몰라도 결코 불안해하지 않는다. 자신을 재충전할 수 있는 자유, 틀에 박힌 단조로운 일에서 해방된 자유를 획득했다는 사실을 즐길 뿐이다.

값비싼 사교육이 공교육의 권위를 무너뜨린 한국에서 교육은 이미 공공의 영역이 아니라 상품경제의 차원이 되었다. 이제 육아도 부모가 아니라 돈으로 지불된 전문 육아도우미와 유아교사가 담당한다. 고민거리가 생기면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대신, 돈을 내고 정신과 의사나 카운슬러를 만나 문제를 해결한다. 지금까지 시장 바깥에 속해 있던 영역들이 이제 돈을 주고 사고파는 코모디티(commodity, 일용 상품)가 되었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유연한 확장성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실패한 혁명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 모든 가치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포스트구조주의(혹은 포스트모던)가 이후 몇 십년간 꽃 핀 것도 우연이 아니다. 포스트구조주의는 68혁명을 준비하기도 했고 68혁명의 혜택을 듬뿍 받기도 했다. 사르트르 이후 프랑스 철학은 다시 세계 사상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반비례적으로 프랑스의 경제 지표는 하락했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가 일으킨 68혁명으로 복지는 늘어나고, 노동자의 권리가 강화되었으며, 근로시간도 주 35시간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는 저(低)성장-고(高)실업의 늪을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68혁명이 원죄로 지목되었다.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 대선 캠페인 당시 '많이 놀고 적게 일하는' 프랑스병(病)의 근본적 책임이 68세대에게 있다고 한 발언이 대표적이다.

프랑스병을 야기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평등주의다. 고교 졸업생들은 대입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에만 합격하면 누구나 집에서 가까운 대학에 들어간다. 학생들이 몰리는 학교와 학과가 있으면 추첨을 해서 입학을 결정한다. 젊은 대통령 마크롱이 이 오랜 평등주의 원칙을 깨고 대학에 경쟁 원리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요즘 연일 프랑스 뉴스를 장식하는 대학생들의 데모는 바로 이 대학 선발 결정에 대한 저항이다. 그러나 1968년과는 달리 시민과 학생들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높은 실업률과 저성장에 시달리며 사양길을 걷는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반증이다. G7 선진국 중 사회주의 전통이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프랑스가 변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한국의 좌파는 촛불시위를 굳이 ‘촛불혁명’이라 명명하고, 촛불혁명과 68혁명의 동질성을 강조한다.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도 지낸 민중미술 작가 김정헌은 “기득권, 부모 세대들이 구축해 붙잡고 살던 세계를 우린 못 참겠다며 전 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이 페스티벌을 하며 해방을 노래하고 춤췄던 것이 68혁명이었다”면서 촛불시위로 변화된 “한국 사회도 더는 역진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68혁명의 본거지가 변하고 있는데, 오히려 변하고 있지 않는 것은 한국 사회뿐이다. 박정자 객원 칼럼니스트(상명대 명예교수)

박정자 객원 칼럼니스트(상명대 명예교수)  newsfreezo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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