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는 이론적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일찌감치 한국학계에 알려진 편이다. 그녀의 이론이 한국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된 데에는 발 빠른 번역이 한몫을 해왔다. <젠더 트러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불확실한 삶>, <안티고네의 주장>, <윤리적 폭력 비판>에 덧붙여 이제 <젠더 허물기>까지 번역되었다.

게일 루빈이 농담 반 진담 반 '젠더의 여왕'으로 칭했던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을 통해 기존 페미니즘 영토에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젠더 허물기>에 이르기까지 버틀러는 성별(성차)의 이분법에 기초한 젠더 정체성을 허물어내는 데 집중해왔다. 무엇보다 그런 전략은 여성/남성, 이성애/동성애, 정상/일탈, 건강한 몸/병리적인 몸의 경계선을 허물어내고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낸시 프레이저가 지적하다시피, 버틀러 이전의 페미니즘이 주로 계급차별 철폐에 따른 성 평등 사회를 지향해왔다면, 버틀러 이후 페미니즘은 젠더/섹슈얼리티 인정 투쟁으로 선회했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2015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동성 결혼의 합법화를 선언했다. 동성애를 문화적으로 소비하면서 살고 있는 21세기 사람들에게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은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이성애는 자연적인 질서로 군림하고 있어서 문제 제기조차 힘들었다.

버틀러가 이성애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된 것'임을 이론화했을 때, 그 당시만 하더라도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녀에 의하면 이성애는 성적 소수자들을 예외적이고 병리적인 존재로 차별하고 이성애의 '구성적 외부'로 추방함으로써 유지되어온 것에 불과하다. 버틀러의 젠더 해체 전략은 페미니즘 진영(전미여성기구(NOW)로 대표되는 백인 중산층 이성애가족 중심 페미니즘) 안에서도 드러났던 동성애 편견과 거부감을 깨는 데 유효했다. 버틀러의 이론을 거쳐 나오게 되면, 레즈비언은 병리적인 주체가 아니라 가부장제 질서에 저항하는 예민한 정치적 주체로 부각된다.

 

▲ <젠더 허물기>(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젠더 허물기>에 이르러 버틀러는 이제 젠더를 넘어 '인간'이라는 철학적 주제로 나아간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살아볼 만한 삶은 어떤 것인가? 공적으로 애도할 만한 삶은 어떤 삶인가? 생존 가능한 삶에서 젠더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처럼 젠더를 넘어선 주제들을 고민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젠더는 페미니즘의 해방구에서만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을 구성하는 '보편적'인 범주로 격상된다. 버틀러는 젠더를 허물어냄으로써 젠더의 철학화와 철학의 젠더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런 맥락에서 <젠더 허물기>는 버틀러 이론의 진화 과정에서 젠더를 넘어 철학으로 귀향하는 다리처럼 보인다.

다른 한편 젠더 허물기를 통해 성적 소수자들의 합창이 울려 퍼지고 저항이 가시화될수록 기존의 젠더 규범에 순응하고 동조하는 사람들은 젠더 경계가 불확실한 사람들에게 노골적인 혐오와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젠더 정상성을 담보해주는 사회적 규범 너머에 있는 사람들을 '호모 사케르'로 만드는 폭력적인 충동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성애 정상성/동성애 일탈'의 경계가 생각만큼 분명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런 경계 불안에 대한 두려움을 진정시키는 한 가지 방식이 혐오와 폭력성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고 버틀러는 지적한다. 그런 폭력성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경계가 모호한 정체불명의 타자를 파악하고 장악하려는 앎에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여기서 버틀러는 이와 같은 폭력성이 서구 주체 철학의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서구의 주체 중심 철학은 수천 년 동안 동질적인 자아 정체성을 주장하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동질적인 자아 정체성이라는 환상을 부숴버리는 존재가 타자다. '나'의 경계를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은 '나'에 선행하는 '너'의 존재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오래된 철학적 질문이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넘어가는 데 적어도 서구 철학에서는 수천 년이 걸렸다. 나는 나이며, 나는 나가 아닌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자기 동일성의 논리다. 하지만 타자를 완전히 식민화시킬 수 없음으로써,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음을 말한 이론가가 지크문트 프로이트다.

타자로 인해 나의 동일성, 자율성, 독립성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나'는 나의 주인이 못 된다는 '굴욕(humiliation)'을 맛보게 된다. 자기 동일성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나르시시즘적인 주체에게 이처럼 굴욕을 안기는 것이 다름 아닌 타자다. 타자로 인해 주체는 상처입고 취약성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버틀러는 너 없는 나의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타자로 인해 '나'가 얼마나 취약하고 상처입고 굴욕을 당할 수 있는지를 절실하게 깨달은 사건이 버틀러에게는 911 테러였던 것처럼 보인다. 911 이후 그녀는 단지 난해한 강단 페미니스트 이론가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현실에 개입하여 정치적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아랍의 민주화 열풍, '점령하라 운동', 2015년 파리 테러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애도하고 분노하고 다른 목소리로 노래하라고 역설한다.

인간은 타자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취약하고 상처 입는다. 따라서 나를 구성하는 무수한 타자들의 다수성, 이질성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의 폭력성이 줄어들 것이고 공존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그녀는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즘 들어 다수성, 이질성, 타자성은 만병통치약처럼 언급된다. 그런 것들을 인식한다고 하여 인간의 폭력성이 줄어들고 공존의 가능성이 확대될 수 있을까? 주체와 타자 사이에 젠더는 어떻게 관계하는 것일까? <젠더 허물기>를 다 읽고나도 그 점은 점점 더 모호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젠더가 인간의 조건을 구성하는 보편 범주로 확장된 결과 젠더가 아예 삭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로 인해 버틀러의 '젠더 너머' 페미니즘이 얻은 것은 철학이지만 잃은 것은 젠더라는 혐의를 떨칠 수 없게 된다. 그 점은 도래할 페미니즘이 고민해야 할 과제의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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