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 11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4ㆍ3유족대표와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을 초청한 가운데 청와대에서 4ㆍ3특별법에 직접 서명하고 있다

 1978년 4ㆍ3 30주기에 발표된 현기영 선생의 소설 ‘순이 삼촌’이 4ㆍ3 당시의 잔혹함을 처음 알렸다. 이후 현기영 선생은 갖은 고문에 시달렸고, 책은 판매 금지되기도 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전국적으로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다. 제주4ㆍ3의 진상 규명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제주4ㆍ3의 진상규명 운동사(史)는 우리나라 민주화 수준과 정비례한다.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

제주도민을 소위 ‘빨갱이’로 몰았던 이승만(초대~3대) 전 대통령이 4ㆍ19혁명으로 1960년 하야(下野)했다. 붕괴된 이승만 정부에 이어 윤보선(4대) 전 대통령이 집권했다. 이승만 정부가 붕괴하자 전국적으로 4ㆍ3을 포함한 이승만 정부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1년 만인 1961년 5ㆍ16군사정변으로 박정희(5~9대) 군사정부가 들어섰다.

박정희 정부에서 제주4ㆍ3 피해자들은 4ㆍ3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1965년 12월 3일자 조선일보에 북괴공작대 일당 8명을 검거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일본에서 침투해 공산 혁명을 노린다는 내용이다. 검거된 8명 모두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출신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일본과 수교를 맺으려하자 국민적 반발을 사던 시기에 간첩조작 사건을 일으켰다.

1977년 3월 25일자 조선일보에도 간첩을 검거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간첩 중 1명은 제주교육대학교 초대~2대 김문규 학장이 포함됐다. 초등 교육자를 양성하는 제주 교육계 큰 어른이 졸지에 간첩이 됐다.

간첩을 검거했다는 뉴스가 나올 때 대부분은 박정희 정부에서 국내ㆍ외 정치 등 국민의 반발을 살 때다. 당시 군사정권이 4ㆍ3의 역사를 가진 제주도민을 소위 ‘빨갱이’로 엮기 쉬웠기 때문에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린 제주도민이 많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 김재규 부장에 의해 살해당했다.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그 해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우리나라 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는 전두환 등 신군부에 압력으로 8개월 만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6월 민주항쟁이 4ㆍ3진상규명 앞당겨

전두환(11~12대) 정부에서도 4ㆍ3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아픈 상처였다. 1987년 4월 13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골자 개헌논의 중지와 제5공화국 헌법에 따른 정부이양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각계각층 지식인은 물론 국민들의 비판이 고조될 무렵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공식성명을 통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ㆍ은폐됐다고 밝혔다.

국민들은 분노했고,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ㆍ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전국적으로 열렸다. 20여 일간 지속된 6월 민주항쟁은 전국 민주화 운동에 불을 지폈다. 결국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됐지만, 당시 민주화 운동의 큰 역할을 하던 김영삼ㆍ김대중 후보 단일화 실패로 노태우(13대) 전 대통령이 집권하게 된다.

‘4ㆍ3은 말한다’의 시작

6월 항쟁에 힘입어 제주의 일간신문에서 4ㆍ3취재반이 꾸려졌고, 1989년 4월 3일 제주대학교에서 4ㆍ3추모제가 열렸다. 그 해 5월 10일에는 제주4ㆍ3연구소가 개소했다. 또 전국 대학생들의 4ㆍ3진상규명을 위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민주화와 함께 제주4ㆍ3의 진상규명운동이 본격화됐다.

1990년 1월 22일,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대통령과 제2야당 통일민주당 김영삼 대표,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대표가 민주자유당으로 3당 합당을 발표했다. 거대 여당의 탄생과 함께 1993년 김영삼(14대) 정부가 집권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제주4ㆍ3 진상규명과 관련된 자료와 증언이 일정 부분 확보된 상태였다. 제주4ㆍ3을 얘기할 수 있었지만, 정부 차원의 움직임은 없었다.

1998년 김대중(15대) 정부에 들어서면서 4ㆍ3진상규명운동이 힘을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제주4ㆍ3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공약했다. 김대중 정부에서도 4ㆍ3과 관련된 공약 이행을 촉구하는 시위와 기자회견 등은 계속됐다.

제주 언론, 노조, 교육, 문화, 시민사회 등 각계각층을 총망라한 ‘4ㆍ3특별법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가 1999년 10월 28일 기자회견을 열어 김대중 대통령에게 4ㆍ3관련 공약 이행을 촉구했다. 결국 1999년 12월 국회에서 4ㆍ3특별법이 통과했다. 2000년 1월 11일 김대중 대통령이 서명했고, 이튿날인 1월 12일 제정ㆍ공포됐다. 특별법이 제정된 해 8월 28일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정부기구로 탄생했다.

2003년 고 노무현(16대)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해 4월 3일에는 4ㆍ3평화공원 조성사업 기공식이 함께 진행됐다. 같은해 10월 15일 4ㆍ3진상조사보고서가 나왔고,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 공권력에 의해 피해 입은 제주도민과 4ㆍ3유족에게 고개를 숙였다. 노 대통령은 2006년 제58주년 4ㆍ3위령제에도 참석해 4ㆍ3희생자에 대해 헌화ㆍ참배했다.

2008년 취임한 이명박(17대) 정부와 2013년 취임한 박근혜(18대) 정부에서 4ㆍ3의 시계는 거꾸로 흘러갔다. 일부 세력은 4ㆍ3특별법 폐기와 4ㆍ3위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헌법소원심판과 행정소송, 국가소송 등 총 6건의 소를 제기하기에 이른다. 4ㆍ3피해자가 아니라 공산 폭도이기 때문에 희생자 명단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들의 주장은 2012년까지 계속됐지만, 모든 소가 법원에서 기각됐다.

또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은 단 한번도 4ㆍ3추념식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촛불혁명에 의해 사상 초유 탄핵 사태를 맞았고, 뒤이어 집권한 문재인(19대) 대통령은 올해 4ㆍ3 70주년 추념식에 참석해 4ㆍ3영령 앞에 고개를 숙였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4ㆍ3추념식 참석은 노 전 대통령에 이은 두 번째다.

4ㆍ3의 진상규명 운동사는 우리나라 민주화 수준과 정비례한다. 군사정권 등을 거쳐 민주정부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진상규명이 시작됐다. 4ㆍ3진상규명에서 87년 6월 항쟁은 큰 역할을 했다. 결국 6월 항쟁의 열기가 4ㆍ3 진상규명에 불을 지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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