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을 쓰다

절벽 위에서 절벽을 본 적이 있다 갈피 속을 튀어나온 눈알들이 절벽을 보고 있었다 오랜 금서를 훔쳐본 그림자들이 소용돌이치는 수평선이 손발을 흔들고 있었다 빗줄기 위에 햇살, 내 몸 속으로 잠수하는 절벽들이 빗줄기 되어 흐르고 먹색 망토 밖을 아니 절벽의 둔부가 절벽의 맨발이 햇살로 타오르는 밤, 무성한 절벽들이 무수한 절벽을 흐르고 있다 갈피마다 한 장의 절벽이 내게 왔고 내가 허공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한 컷의 배후를 생각하는 나의 기록을 배후라 하면 가능할까?

살아나지 않는 언어들이 절벽의 책장을 쥐고 있었다.

어저께 계간 '시와 세계" 여름호를 받고서 김서은 시인의 시를 인상 깊게 읽었다. 내가 한번쯤 써보고 싶었지만 도저히 불가한 영역을 김 시인은 절묘하게 표현해 놓고 있었다. 몇 번을 읽노라면 가만히 무릎을 치게 하는 시들이다.

문학...아니 예술...아니 인간 행위의 기본 전제는 표현과 전달의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혹은 화자의 주관적 표현에 비중을 두는가, 독자 대상을 보다 염두에 두는가에 따라 작품의 갈래와 그 예술성의 차원은 갈려질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근현대시의 자유롭고도 실험적인 창작 행위가 역사적으로 진보해 도달한 자유(민주)주의와 개인주의라는 두 사상적 축에서 비롯되었고 또한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이땅의 작가들은 창작환경의 시대적 축복을 누리고 있다고 보여진다.
김서은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먼저 갖게 되는 생각이다.

김 시인의 시는 프로이드가 밝혀낸 의식세계와 피카소가 그려낸 삶의 실존적 무늬를 시로써 형상해 냈다는 일차적 느낌을 갖게 한다. 실험적 난해함과 함께 인간의 사유와 실존에 대한 심층미학을 품고 있는 김시인의 시는 그래서 몇번을 되뇌이게 된다.

대개의 요즘 현대자유시의 흐름처럼 전달보다 표현에 비중을 둔 접근방식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저마다의 해석과 감상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김시인이 자신의 의식, 무의식 세계를 고백하듯 쏟아놓은 시는 과연 시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되묻게 하는 고뇌어린 작품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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