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보고서에서 중국군 2만4141명 사살 확인,. “유해 송환하고 추모하는 것인 것이 상생의 길”

파로호가 있는 강원도 화천 지역에서 미군에게 포로가 된 중공군의 모습. 대한민국 정부 기록 사진집

강원도 화천군 파로호(옛 화천저수지)에 중국군 2만4천여명이 수장됐다는 미군 보고서가 확인됐다. 한-중 관련 단체에선 6·25 전쟁의 또다른 희생자인 중국군의 유해를 발굴해 이제라도 중국으로 보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6·25 전쟁 때 북한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를 미국으로 송환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25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공개한 ‘미 제9군단 지휘보고서’를 보면, 1951년 5월24~30일 강원도 화천 파로호 인근에서 사살된 중국군은 2만4141명이다. 이들의 주검을 확인한 부대별로 보면, 한국군 6사단 1만3383명, 2사단 772명, 미군 7사단 6982명, 24사단 3004명 등이다. 하지만 2만4천여구의 중국군 주검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미 제9군단은 파로호 전투에 참가한 한·미 연합군을 지휘한 부대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중국군의 구체적인 숫자가 공식 기록을 통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5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공개한 ‘미 제9군단 지휘보고서’(Ⅸ Corps Command Report) 내용 일부. 이 보고서에는 24시간마다 사단별로 중국과 북한군 사살자 현황이 기록돼 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을 종합하면, 1951년 5월24~30일 강원도 화천 파로호 인근에서 사살된 중국군이 2만4141명에 이른다. 미 제9군단 지휘보고서 갈무리
25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공개한 ‘미 제9군단 지휘보고서’(Ⅸ Corps Command Report) 내용 일부. 이 보고서에는 24시간마다 사단별로 중국과 북한군 사살자 현황이 기록돼 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을 종합하면, 1951년 5월24~30일 강원도 화천 파로호 인근에서 사살된 중국군이 2만4141명에 이른다. 미 제9군단 지휘보고서 갈무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한·미 군이 사살했다고 확인한 2만4141명의 중국군 가운데 대다수가 파로호에 수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군은 화천저수지 일대에서 포위돼 퇴로가 막혔다. 당시 한국군 장병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마어마한 숫자가 물에 빠졌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주변 마을에선 중국군 3만명이 파로호에 수장됐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왔다.

파로호에 설치된 ‘파로호 비석’에는 ‘중국군 제10·25·27군을 화천저수지에 수장시킨 대전과를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전선을 방문해 ‘파로호’라는 친필 휘호를 내렸다. 그 후 화천저수지를 파로호라 불렀다’고 기록돼 있다. 파로호는 ‘오랑캐를 깨뜨린 호수’라는 뜻이다.

한-중 우호단체에서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수장된 중국군의 유해를 발굴·송환하고 위령탑을 세우는 등 중국군 전사자 추모 사업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허장환 한중국제우호연락평화촉진회 공동대표는 “남의 나라 전쟁에 보낸 남편과 아들의 생사도 모르는 중국군 가족들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비록 한때 적국이었지만, 이제라도 서로 쌓은 원한을 풀고 상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남한에서 발굴한 유해는 1만2천여구다. 이 가운데 중국군 유해는 589구(북한군 700여구)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모두 국군 유해다. 하지만 중국이 밝힌 당시 중국군 사망자는 11만6천여명이며, 실종자와 포로 2만9천여명을 더하면 모두 14만5천여명이다.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사망한 중국군 유해는 2013년 12월 한-중 간 합의에 따라 지금까지 5차례에 걸쳐 589구가 송환됐다. 2014년 3월 처음으로 437구가 인도된 이래 2015년 3월(2차) 68구, 2016년 3월(3차) 36구, 2017년 3월(4차) 28구, 2018년 3월(5차) 20구가 송환됐다. 중국군 유해 송환은 2013년 6월 중국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제안해 추진됐다.

파로호 전투는 ‘현대판 살수대첩’으로 유명하다. 1951년 5월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한·미 연합군이 중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2만4141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뒀다. 이처럼 연합군과 중국군이 파로호에서 목숨을 걸고 맞붙었던 이유는 화천수력발전소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변변한 전력시설이 없던 당시 남한은 화천댐을 반드시 확보해야 했고, 같은 이유로 북한으로서도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한·미 연합군은 전투가 끝나고 여기저기 흩어진 중국군 주검을 처리하는 일로 골머리를 앓았다. 당시 6사단 공병장교(당시 중위)로 전투에 참여했던 고 허장원씨는 그의 동생 장환씨에게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파로호 주변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했다. 허장환씨는 “당시 주검은 너무나 많았고, 날씨는 더워지고 있었다. 주검을 가장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안이 파로호 수장이었던 것 같다. 형은 모든 전투가 끝난 뒤 한·미 연합군이 파로호 일대의 산과 들에 흩어진 중국군 주검을 불도저 등 중장비로 파로호에 밀어넣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당시 파로호 전투 상황에 대해 화천군이 발간한 <화천군지>에도 “퇴각하는 적을 협공, 대부분의 적이 화천저수지(현 파로호)에 수장당했다. 저수지 주변과 계곡 일대는 적의 주검으로 뒤덮였다. 우리 후속 부대는 불도저로 주검을 밀어내면서 전진해야 했다. 중공군 도살장이었다”고 기록해놓았다.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이 중국군의 주검을 일부러 파로호에 수장한 것이 사실이라면 제네바협약을 위반한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제네바협약 17조는 ‘사망한 적을 그의 종교 관례에 따라 매장하고 유해의 송환을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001년에는 화천군이 나서 정부에 파로호 중국군 유해 발굴과 위령탑 건립을 건의했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지역 주민들은 대외적으로 인권을 중시하는 미국이 적군 전사자를 집단으로 수장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정부가 미국 눈치를 보느라 움직이지 않은 것이라고 본 것이다.

강원도 화천 파로호 인근에 있는 파로호 비 모습.

 중국군 유해 발굴을 위해선 넘어야 할 산도 많다. 국방부는 2007년 유해발굴감식단을 창설하고 유해 발굴 사업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유해발굴감식단이 한 곳에서 발굴한 유해는 최대 70여구다. 이제까지의 사업에 견주면 파로호의 중국군 유해 발굴 사업은 규모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더욱이 ‘6·25 전사자 유해의 발굴 등에 관한 법률’은 전사자 가운데 국군을 우선 발굴하게 돼 있다. 유해발굴감식단 관계자도 “국군 유해를 찾다가 중국군 유해를 발굴해 중국으로 송환한 적은 있다. 하지만 중국군 유해를 찾기 위해 따로 발굴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50m에 이르는 파로호 수심과, 수문을 모두 열어 물을 모두 빼야 한다는 점도 어려운 점이다. 각종 수해와 방류 등 영향으로 중국군 주검들은 화천댐 수문이 가까운 곳에 몰려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발굴을 위해 파로호의 물을 모두 빼면 파로호에서 어업을 하는 어민들이 반발할 수 있다. 또 파로호에 중국군 주검이 2만구 이상 수장됐다는 사실 자체가 이 지역 어민 등 주민들에겐 달가운 일이 아닐 수 있다.

허장환 한중국제우호연락평화촉진회 공동대표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번에 중국군 유해를 발굴해서 이 문제를 깨끗이 털어버리는 것이 낫다. 파로호는 팔당호의 상류 가운데 하나인데, 2만명 이상의 중국군 유해가 가라앉아 있는 그 물을 수도권 주민들의 상수원으로 사용한다면 기막힌 일 아닌가”라고 말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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