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사람들을 대할 때는 늘 겸손하고 공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졌다고 으스대고 남을 낮추게 되면 결과적으로 우리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화안애어

얼마나 사랑을 해 보셨는지요? 아마 사랑 한 번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도 젊었을 때부터 셀 수 없을 정도로 사랑을 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할 때야 말로 가장 행복했으니까요? “언제 행복하다고 느끼느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라고 말합니다.

그럼 “언제 불행하다고 느끼느냐?”는 질문에는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할 때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참 많은 사람들을 행복의 구름 위로 띄웁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을 얻으려면 내가 먼저 그런 사랑을 해야 행복을 구가(謳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순수하고 조건 없는 사랑은 소유하거나 지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랑이 어느 순간 불행으로 바뀌는 이유는 소유하고 지배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불행으로 바뀌려고 할 때, 상대방을 원망하기에 앞서 내가 상대방을 소유하고 지배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를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집착 대신 순수한 영혼의 사랑을 선택해야 하지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히 우리 곁에 있으리라 방심하면 안 됩니다. 흐르는 세월 앞에는 무엇도 영원할 수 없습니다. 사랑도 할 수 있을 때, 마음도 몸도 흠뻑 줄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다음을 기약하는 사랑은 하나마나입니다. 형편이 되면 사랑한다는 핑계는 안 하니만 못합니다.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화안애어(和顔愛語)>라는 말이 나옵니다. 언제나 부드럽게 미소 띤 얼굴로 사람을 맞이해 상냥한 말을 건넨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사밧티의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외출을 하셨다가 핑기카 라는 젊은이에게 듣기 거북한 욕지거리를 들었습니다.

부처님은 욕지거리를 듣고서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잠자코 참았습니다. 조금 후에 그가 잠잠해지자 부처님은 웃으시며 타일렀습니다. “젊은이여! 그대의 집에 온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했는데 손님이 상을 받지 않으면 음식은 누구의 것이 되는가?” “그야 당연히 내 것이지요.” “그대는 나에게 욕지거리의 진수성찬을 차려 냈는데 나는 음식상을 받지 않겠다.” 그 제서야 젊은이는 무릎을 꿇고 사죄합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화안애어’를 실천하게 되면 삼업(三業)이 청정해 진다고 합니다. 첫째는 신업(身業)으로 몸으로 온화한 업을 짓는 선업(善業)입니다. 둘째는 구업(口業)으로 부드러운 말씨로 짓는 선업이요. 셋째는 의업(意業)으로 온화한 마음으로 짓는 선업입니다. 우리도 이 삼업이 청정해지면 부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남에게 온화한 표정과 부드러운 말씨로 대하게 되면 내가 먼저 기분이 좋아집니다. 반대로 험악한 얼굴 표정에 거칠고 상스러운 말을 쓰게 되면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자신입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먼저 웃음 짓는 것은 기쁨을 베푸는 보시(布施)입니다. 어린 아기의 천진난만한 웃음 앞에서 어른들은 기뻐하며 아기처럼 천진스러워집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인연을 맺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대할 때는 늘 겸손하고 공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졌다고 으스대고 남을 낮추게 되면 결과적으로 우리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불가(佛家)에서는 인간 행위의 근원을 몸(身), 입(口), 마음(意)으로 나누고, 이를 삼업(三業)이라고 부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으뜸인 것은 마음(意)이지요. 왜냐하면 마음(생각)이 움직여 몸이 이를 행하고 다시 그 생각이 말로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법구경(法句經)》에서는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이루어지고 마음이 행하고 있으므로 마음의 움직임을 자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탐욕을 조장하고, 마음이 화를 조장하며, 그 마음이 어리석음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이 마음만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성자가 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화안애어’는 따뜻한 얼굴로 사랑스럽게 말하는 것입니다. ‘화안애어’라는 사자성어 속에는 ‘인간에게 향하는 무한대의 자비심’이 숨겨져 있습니다. ‘따뜻한 얼굴’로서 사람을 대하고 ‘사랑스러운 말’로서 교류한다면 이 세상은 진정으로 화낼 일이 없으며 다툼도 없을 것입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자비(慈悲)는 ‘남이 모자란 것이 있거나 괴로운 일을 당하거든 적극적으로 자비의 마음으로 그를 대하라.’는 것입니다. 즉 ‘화안애어’란 자비심의 발로이며 자신이 부처에게 다가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으로부터 항상 존경과 신임을 받기 위해서는 ‘화안애어’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가 ‘화안애어’를 실천하게 되면 삼업(三業)이 청정해집니다. 삼업이 청정해지면 우리도 부처님처럼 됩니다. 반대로 말이 거칠고 험한 얼굴이 되면 아무리 잘 생긴 얼굴도 나찰(羅刹)의 모습이 되고 맙니다. 힌두 신화에 나오는 악마나 악귀의 전형이 나찰입니다. 그러나 부처로 살아가기가 소원이라면 환한 얼굴에 부드러운 말씨를 써야 합니다.

교만(驕慢)이 많으면 사람을 잃고, 외식(外飾)이 많으면 진실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을 잃으면 세상을 버림이요, 진실을 잃으면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원불교의 2대 종법사를 역임하신 정산(鼎山) 송규(宋奎) 종사님은 ‘화안애어’의 대표주자이셨습니다. 그래서 김진구라는 분은 정산 종사를 ‘제월광풍(霽月光風)’이라 했고, 황성타라는 분은 ‘화풍경운(和風慶雲)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 유명한 안병욱 교수는 “내가 이 세상에서 본 가장 좋은 얼굴”이며, “얼마나 정성껏 수양을 쌓으셨기에 저와 같이 화열(和悅)과 인자(仁慈)가 넘치는 얼굴이 되셨을까!” 하셨습니다. 우리의 얼굴도 ‘화안애어’가 넘치는 그런 얼굴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름다운 말 한 마디, 미소 짓는 화(和)한 얼굴에 죄와 복이 왕래합니다. 우리 언제나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 한 마디라도 사랑을 듬뿍 실은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얼굴이며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 까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6월 27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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