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혼과 천합
요즘 혼인(婚姻)생활이 위기인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도 이혼(離婚)소송 중 아이들을 만나게 해주지 않는다고 아내를 살해하고 도망 다니다가 자수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또 드라마에서 조차 졸혼(卒婚)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것도 모자라는지 휴혼(休婚)에 해혼(解婚) 얘기까지 나오니 분명 혼인생활이 위기임이 분명합니다.

이혼은 혼인한 남녀가 생존 중에 성립된 결합관계를 해소하는 행위입니다.

졸혼은 중년 이후의 부부가 선택하는 자유를 인정하는 결혼생활입니다.

해혼은 부부가 합의에 의하여 혼인 관계를 인위적으로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휴혼은 젊은 부부들이 각자인 듯함께 사는 새로운 결혼 형태를 말합니다.

예로부터 우리는 혼인을 천합(天合)이라 했습니다. 천지합일(天地合一) 즉, 하늘과 땅의 결합처럼 성스러운 것이 혼인이지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의 정신이 황폐해지면서 생각해 내는 꾀가 꼭 죽는 꾀만 내고 있는 혼인생활의 위기로 치닫고 있는 것 같아 여간 씁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해혼이란 말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서른일곱 살에 아내에게 해혼식(解婚式)을 제안 했고, 아내는 많은 고민을 하다가 해혼에 동의 했습니다. 그 해혼을 성사시킨 후에야 간디는 고행의 길을 떠났다고 하네요.

혼인이 부부의 연을 맺어주는 것이라면, 해혼은 혼인 관계를 풀어주는 것이 됩니다. 해혼은 부부가 불화로 갈라서는 이혼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까 해혼은 하나의 과정을 마무리하고 자유로워진다는 뜻이 아닐까요?

인도에서는 오래전부터 해혼문화가 있다고 합니다. 해혼이란 부부가 자식들 키우며 열심히 살다가 자녀가 결혼하면 각자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방식일 것입니다. 꽤 오래 전 인도의 타지마할을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가 타지마할이라고 하지요. 인도 무굴제국의 황제 샤자한이 사랑하는 아내 뭄타즈가 세상을 떠나자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22년간 지었다는 그 묘지는 묘지가 아니라 대리석으로 빛나는 천상의 궁전이었습니다.

샤자한과 그의 아내 뭄타즈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인도에서는 이생과 내세(來世)가 둘이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인연이기에 죽은 아내를 떠나보내는 데 그토록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요? 아내와 함께 묻힐 묘지를 짓는 데 평생을 바치는 황제의 사랑이 참으로 대단 합니다. 그 타지마할 인근에 ‘간디 아쉬람’이 있습니다.

‘간디 아쉬람’은 마하트마 간디가 독립 운동본부로 이용하며 거주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1915년 5월 간디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생활공동체’인 아쉬람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17년 7월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습니다. 간디의 비폭력 운동이 탄생한 이곳은 1930년 3월 12일 시작된 ‘소금 행진’의 출발지이기도 하지요.

거기서 간디의 해혼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인도에서 해혼은 그리 낯선 문화가 아닙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결혼의 굴레를 풀어주고, 자유인이 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샤자한과 뭄타즈처럼 영원한 사랑의 원형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해혼식을 하고 자유인으로 사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도 같습니다.

인도는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힌두의 땅이고, 브라만의 땅입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많은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인도 문화의 정수인 명상수행이 삶이 될 수 있는 자유로운 계층이기도 합니다. 브라만의 아이들은 어린 시절에는 충분히 배우고, 청년이 되면 좋은 가문의 배우자를 만나 혼인을 합니다.

부모가 그랬고, 조상들이 그랬듯이 그들은 가정을 충실히 꾸립니다. 돈을 벌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브라만 계급에 맞게 잘 교육해 혼인까지 시키지요. 자식이 혼인하면 자연스럽게 평생 동반자로 살아온 배우자와 해혼을 해도 되는 것입니다. 간디의 해혼식은 머리 좋은 사람의 기발한 착상이 아니라 인도 문화가 용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도인들이 ‘해혼식’이라는 형식이 필요했던 것은 그것이 결혼식만큼이나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의 의무를 끝내고, 자유인으로 돌아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겠다는 의지를 낸 사람의 삶은 존중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니까요.

브라만의 남자들은 해혼 후 대부분 숲으로 들어가 수행을 합니다. 죽음이 멀지 않은 나이 든 한 인간으로서 죽음을 마주하며 삶과 죽음의 의미를 반추(反芻)하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 우리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왜 아이들 키우고 혼인시킨 부부들이 졸혼과 이혼 또 해혼을 하는 것일까요?

아마 ‘자유롭게 자기 뜻대로 살고 싶다’는 뜻이라 생각됩니다. 그동안의 삶이 얼마나 서로에게 구속 되었으면 이런 말이 나올까요? 혼인생활하면서 서로가 믿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 열린 마음으로 배려하며 살았으면 아마 졸혼이나 해혼이란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바라기만 하고 부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부부는 항상 돌아올 곳, 행복한 가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집에 살며 자유로이 살아갈 수 있어야 하지요. 가정은 천국이고 행복한 여생을 만들어 가는 곳입니다. 중년의 이상의 부부는 서로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죽어 타지마할을 지어주면 뭐합니까?

지금 우리 부부가 사는 곳이 타지마할이고 천국입니다. 다 늙어 졸혼 또는 해혼을 생각지 말고 한 집에서 노년을 지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주 친한 친구나 연인처럼 살아가는 부부가 진정한 부부가 아닐까요?

부부간에도 도(道)가 있습니다. 첫째가 화합이고, 둘째는 신의이며, 셋째는 근실(勤實)고, 넷째는 공익(公益)입니다. 내가 힘들고 아플 때 유일한 보호자가 부부이고, 가장 소중한 사람이 부부입니다. 우리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천합을 누리고 살아가면 어떨 까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7월 17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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