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정해│국악인

그랬다. 나는 영화 ‘서편제’ 한 편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서편제’ 흥행으로 가장 좋았던 것은 사람들이 “판소리가 어렵지 않고 좋다”고 말해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소리가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런 변화는 영화를 찍을 때부터 조금씩 감지되었다. 같은 나이 또래의 스태프들이 “가사가 이게 맞나요?”라며 내게 쭈뼛거리며 물어오기 시작했다. 소리가 너무 좋아서 들리는 대로 가사를 적어봤다고 했다. 소리를 하던 나 역시 판소리는 나이 지긋한 어른이나 일부 계층만 좋아하는 장르라고 생각했는데 내 또래 사람들에게 좋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충격일 정도로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국악은 사람들에게 숙제 같은 음악으로 여겨졌다. 우리 것이니 좋아해야 하는 음악, 챙겨야 하는 음악으로 여겨왔다. 그런 숙제 같은 감정을 ‘서편제’ 한 편으로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다. 물론 촬영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찍는 장면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을 때니까. 시사회 때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서 오정해가 아닌 오정해의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주인공으로 연기를 했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보니 소리의 가치와 깊이가 느껴져서 감회가 새로웠다.

1993년 제1회 상하이국제영화제에서 ‘서편제’로 여우주연상 받았을 때는 소리에 대한 감정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였다. 국내에서 사랑받는 것도 벅차고 감사한데, 해외에서까지 인정을 받아 뿌듯한 느낌이었다. 지금이야 여배우가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것이 큰 뉴스가 되지만 당시 상하이국제영화제는 제1회라서 대회 인지도가 없었고, 나 역시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라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소리가 갖는 힘이 한국 영화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날만큼은 오정해 개인이 아닌 판소리꾼을 대표하는 느낌이었다. 부모가 자식 잘 키워서 보내는 것 마냥 개인적 영달이 아닌 판소리 전체의 영광으로 느껴졌다. 시상식에서 우리 한복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어서 평소보다 화려하고 의미 있는 궁중 한복을 입었다. 당의도 처음 입어보고, 쪽머리도 처음이었다. 물론 소리에 일조했다는 기쁨과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 좋은 것을 하고 있다는 뿌듯함, 내가 선택한 소리에 대한 자부심이 가슴속에 층층이 가득 들어찼다. 그 덕에 지금까지도 소리에 대한 애착을 갖고 나아갈 수 있었는지 모른다.

사실 판소리는 지독하게 힘든 노래다. 소리꾼들은 소리를 한번 쥐면 놓을 수가 없다. 그걸 평생 쥐고 사는 것이다. 그렇게 인내로 만든 소리다. 판소리에 대한 격려와 박수는 그 노고에 대한 칭찬인 것이다. 내 인생에서 소리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게 해준 세 분이 있다. 첫째는 소리라는 문을 열어주신 어머니다. 어머니는 목포에서 소리를 배울 때도 “너는 우리나라에서 첫째가 될 것”이라 북돋아주셨고, 상하이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후에는 “앞으로 세계에서 제일이 될 것”이라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분이다. 둘째로는 스승이신 명창 김소희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소리만 잘하려 허지 마. 우선 사람이, 인간이 돼야 올바른 국악인이여”라며 사람됨을 강조하셨는데, 그 덕에 부침 많은 연예계에서도 소리꾼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서편제’로 큰 인기를 끌었을 때 만난 송혜선 매니저도 잊을 수 없다. 몰려드는 섭외와 광고로 정신없을 때 “네가 이걸 다 하면 나중에 진짜로 하고 싶은 걸 못하게 될 수 있다”고 조언해준 사람이다. 돈과 명예, 인기를 거머쥐고도 바뀌지 않을 사람은 없다. 정점의 시기에 내려놓는 법부터 배울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소리꾼 오정해로 살아올 수 있었다. 생소하다고 말하지만 판소리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다. 조선시대의 노래가 지금 시대에 들어맞을 수는 없겠지만, 이 땅에서 농익으며 나온 감정들이기에 애쓰지 않아도 마음으로 전해진다. 이것은 내 부모와 이웃의 이야기고, 나이가 들며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는 장르다. 우리 소리가 앞으로도 더 많은 곳에서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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