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 논개의 사당

아직도 우리는 일본 놈들이 뿌린 역사의 씨앗에서 벗어 나지를 못하고 있다.
진주를 방문하고도 논개 사당을 방문하지 못하고 와서 이 어르신께 죄송할 따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의리와 정의, 그리고, 이 국가를 위하여 의로운 죽음 마져도 왜놈들에게 충성을 다 바친 친일 세력들이 득세하다 보니, 두려워 한다.

주논개를 이해하기 위하여 서는 최경창을 먼저, 이해 하여야 한다.

최경창은 화순의 자랑이다. 그는 화순 중에서도 유명한 능주 사람이다.

능주는 조선 시대의 최고의 개혁 사상가 조광조선생께서 수구 꼴통들의 반격에 의해 그 원대한 꿈을 다 이루어 보지도 못하고 아까운 37세 나이에 귀향가서 요절한 곳이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조광조는 사약을 가지고 온 사헌부 도사를 보고 자기에게 사면 교지를 들고 온 사람으로 알고 반가히 맞이 했을까?

충의공 최경회(崔慶會)장군은 중종 27년(1532년) 11월 22일 화순 삼천리에서 태어나 당시 최고의 석학으로 칭송 받던, 고봉 기대승으로부터 수학해 진사와 문과에 장원급제(1등 학격)를 한 천재였다.

성균관 전적(典籍)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을 거쳐 옥구,·장수,무장현감,영해부사, 영암군수, 담양부사 등을 역임했다.
그의 높은 학식이나, 총명함은 자타가 공인해, 치열한 당파 싸움에서도 나라 중요 요직은 요직은 다 거쳤다.

주논개는 장수군 장계면 주촌리에서 1574년 태어났다.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함양 박씨 사이에 무남독녀로 태어 났다.
그리고, 그에게는 개차반 술주정꾼 주달무라는 삼춘이 있었다.

달문은 한학에 밝았으며, 인근 마을의 아이들을 모아 한학을 가르치고 있던 선비였다.

그러던 중, 달문이 오랜 병으로 얼마 남지 않은 가산을 다 탕진하고 죽자, 그의 삼춘 댁에 의탁하여 살던 중, 삼춘 달무는 형수씨에게 의논도 하지 않은 체, 6세의 어린 소녀를 인근 부자인 김풍헌의 불구자 아들에게 민며느리로 팔아 넘기고, 그 돈을 혼자 착복했다.

나중에야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모녀는 기절 초풍하여,친정이 있는 경상도 땅 함안으로 야밤에 도망가기로 하였다.

그래서, 기회를 엿 보던 두 모녀는 무사히 감시의 눈을 피해 함안에서 몰래 숨어 살았다.

김풍헌은 괜히 돈만 사기 당한 꼴이 되어, 마침 장수 현감인 최경창에게 소를 제기 하며, 이 모녀가 아마 함안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제공하여, 그는 경상도 함안에 사령을 보내어 두 모녀를 붙잡아 오게 했다.

붙잡혀 온 두 모녀의 재판을 담당한 최경창은 문초를 하여, 자세한 내막을 들어 보니, 당사자나 부모와는 전혀 무관한 삼촌의 사기극임을 밝혀 내고 달무를 하옥 시키고, 두 모녀는 무죄 방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모녀는 다시 삼촌 댁에 들어 갈수도 없고, 어디 갈 곳도 없고 또 먹고 살 능력도 없는 이들을 안타까이 여겨, 관아에서 허드렛일이나 시키고 호구지책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몸이 불편한 최경창의 부인은 총명한 논개와 열심으로 그를 수종하는 그의 모친을 사랑하여, 다른 지역으로 임지가 바뀌어도 계속 가족처럼 데리고 다녔다.

최경창은 가는 곳 마다 훌륭한 목민관으로 칭송 받고, 무장현감,영암군수, 관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호조 정랑,형조 정랑,영해 부사등을 거쳐 마침내 담양 부사로 영전하게 된다.

이때, 주논개는 나이가 17세 꽃다운 처녀가 되어, 총명하고 아릿다운 처자를 최부사 부인의 간청으로 소실로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러다가, 최부사는1590년 모친상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면서, 자식으로써 죄인된 모습으로 3년 상을 치르러 가면서, 소실까지 데리고 갈 수가 없어, 논개의 고향인 장수로 보내고 자신은 화순 능주에 있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최경희는 상중이고, 또, 당시 몸이 몹시 불편하여, 직접 의병장에 취임하지 못하고, 큰형 경운과 작은형 경진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주변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여, 장조카 홍재에게 300명을 주어 친구인 고경명의 금산 전투에 보낸다.

임금은 비록 나를 버렸지만, 나는, 이 나라를 버리지 않았다고 전 동래부사 고경명은 "나라가 있고, 양반이나 가문이 있지, 나라를 빼앗기면 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두 아들 인후와 종후를 데리고 전쟁에 참여하여, 아들 인후와 함께 금산에서 장렬히 전사하고 만다.

이 어른도 최경창과 같은 스승, 고봉 기대승의 수제자였다.

그 작전 상황을 문홍헌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경창은, 장수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의병들을 인도할 의병장으로 간곡히 붙탁하는 그의 의견을 받들어 의병장의 책임을 맡기로 결심한다.

그는, 의병들을 이끌고 남원을 거쳐 자기가 현감으로 근무하여 지형을 잘 알고 또 지방 유지들로 하여금 식량 모집이 용이한 장수로 진지를 옮기었다.

그후, 그를 흠모한 백성들이 군량미를 들고 오고, 의병을 하기로 자정하여, 많이 이들이 모이자, 이들을 조직적으로 군사 훈련과
진법을 가르쳤다.

여기서, 잘 훈련된 이 의병들은 무주 전투, 금산 전투에서 크게 일본군을 무찌르고 사기가 충천 하였다.

이때, 진주성이 위험하다며 김성일이 지원을 요청 하였다.

부하들은 지형이 익숙한 이곳에 계속 주둔 하자고 하지만 “경상도도 우리땅 이다”하며 출격한다.

이 싸움은 임란 3대 대첩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전승이었는데, 그의 공이 컸다. 김시민이 목사로 진주성을 지키고 강 남쪽에서는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이 기습하고, 북쪽에서는 경창이 이끄는 의병 5,000이 배후를 공격하고, 또, 전라 좌 의병장 임계영이 합세하여 위협하니, 일본 군은 많은 희생 만을 남기고 도망가 버렸다.

그후, 성주성 전투에도 참여해 혁혁한 공을 세우자, 김성일은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의병이 아닌 정식 장군에 임명된다.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 그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3천5백의 군사로 9만3천의 왜적을 맞아 9일 밤낮을 버티다가 결국 성이 함락되고, 그는, 남강에 투신 자살하고 만다.

그 현장에는 그의 소실이었던 주논개도 함께 하였다.

일본군들은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수 많은 장수를 잃었던 패배를 드디어 정유 재란 때, 이곳을 함락시키고 진주 촉석루에서 성대한 전승 파티를 하였다.

이때, 주논개는 기생으로 위장하여 그 파티에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흥이 무르익어 갈 무렵 강가 홀로 떨어진 의암 바위 위에서 혼자서 더덩실 더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게야무라 로쿠스케 왜장은 술이 취해 눈을 게르슴하게 떠 보니,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춤을 추는 그녀에게 홀딱 반해 버리고 말았다.그리하여, 비틀 거리며, 의암으로 닦아가 함께 춤을 추려 했으나 미리 준비한 열손가락에 옥 반지를 끼고, 갑옷입고 술취한 그와 함께 강물에 몸을 던지고 만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은인 최경창과 함께 남강에 던진, 슬픈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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