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탄핵을 끌어낸 촛불혁명의 시발점과 주동세력 !

일간지 기자로, 언노련 조합원으로 촛불 현장에 초기부터 있었던 저자는 틈틈이 촛불혁명의 주동자를 만나고 그들의 선언문, 주장과 증언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광장에서 쫓겨나는 기자들을 목격하면서 ‘기레기’가 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다.

촛불 이후 나온 책과 자료집은 거의 대부분 2016년 10월 24일 JTBC의 태블릿PC 보도로 인한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촛불의 시작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촛불의 시발점은 아무리 늦게 잡더라도 2015년 11월 14일, ‘박근혜 정권 퇴진’ ‘가자 청와대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던 제1차 민중총궐기부터 잡아야 한다고 본다. 이날은 바로 고 백남기 농민이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날이다.

이 책은 다른 촛불혁명 관련 책과 다르게 민중총궐기를 오랫동안 준비한 민주노총, 전농 등의 민중진영을 중심에 놓고 촛불혁명을 기록하고 있다.

[ 서평 ] 박근혜 정권 탄핵의 1등 공신은 광화문 광장에 모인 촛불시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촛불혁명의 시발점을 JTBC의 태블릿PC 보도(2016년 10월 24일) 이후의 촛불집회에 두는 경향이 있다. 이에 따라 촛불항쟁의 주요 계기로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떠올린다. 촛불시위를 주도한 퇴진행동의 공식백서도 2016년 10월 19일 촛불집회를 촛불의 시발점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시각은 촛불 진정한 의미를 축소 왜곡하는 심각한 오류라고 주장한다. 촛불항쟁의 현장에서 초기부터 취재했던 원희복 기자는 촛불항쟁의 시발점과 주동자, 그리고 항쟁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한다.

첫째, 촛불의 시작은 “최소한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에 맞은 2015년 11월 14일”이라고 말한다. 민노총, 전농, 전교조 등이 참여한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주도한 2015년 11월 14일의 제1차 민중총궐기 이후 2016년 말까지 여러 차례의 대규모 민중총궐기집회가 열렸고, 이는 촛불혁명의 마중물이었다.

두 번째, 저자는 촛불항쟁의 주체가 포괄적 의미의 시민이라기보다는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된 민중진영이라고 본다. 대부분의 시민단체와 민주당 등의 정치권이 박근혜 정권의 막가파식 통치에 방관하고 있을 때 “해고와 비정규직에 내몰리던 노동자, 신자유주의 농업정책에 신음하던 농민, 친일?독재 미화 국정교과서로 가르쳐야 하는 교사, 자신의 신념을 세우려다 탄압받은 진보정당 당원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부모들, 분신과 구속을 겪으며 온몸으로 민주화 역사를 쓴 민주화운동가들”이 민중총궐기를 통해 박근혜 정권에 맞섰다는 것이다. 2015년 11월 14일 제1차 민중총궐기에서 내건 핵심 슬로건은 ‘박근혜 정권 퇴진!’이었다.

세 번째, 이번 촛불의 성격을 ‘촛불민중혁명’이라고 규정했다. 사회과학적으로는 혁명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논란의 여지가 있고, 사회 구조를 바꾸는 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4.19를 혁명이라 부르듯 촛불항쟁도 혁명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 언론의 “역사는 오늘을 1960년 4?19 혁명에 이은 민주주의 혁명으로 기록할 것이다. 11?12 혁명, 우리는 오늘 새로운 역사를 쓴다.”는 보도를 인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4월 혁명은 이승만을 추방하는 데 그쳤지만 촛불혁명은 권력자를 감옥에 넣은 더 위대한 승리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촛불혁명이 6월 시민혁명보다 더 진일보한 점이 있다고 평가 했다. 촛불혁명은 “30년 전 6월 시민혁명이 키운 노동조합과 농민?통일?빈민?학생 등 이른바 민중세력이 시작한 민중혁명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현장 취재와 수십 명의 촛불 주역 인터뷰를 통해 촛불혁명의 본질을 밝히려 했다. 당시 촛불시위 현장에서는 박근혜 정권에 부역하던 기자들이 시민들에 의해 ‘기레기’라는 조롱을 당하며 쫓겨나기도 했다. 원희복 기자는 ‘저자의 말’을 통해 “기레기가 되지 않으려는 생각”을 갖고서 틈틈이 촛불혁명의 주동자를 만나고 그들의 선언문, 주장과 증언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고 밝혔다. 이 책은 촛불혁명의 본령을 증언하는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높다 하겠다.

책속으로

71- 박근혜 정권이 먼저 시작한 이 역사전쟁은 오히려 민중혁명을 움트게 만들었다. 역사전쟁은 급속한 국민적 이반을 불러일으키면서 정권붕괴를 자초했다. 정통성이 취약했던 박근혜 정권은 역사전쟁에 패배함으로써 급격히 무너졌다.

162-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후 반박근혜 투쟁노선에서 민주노총이 가장 적극적 대안세력으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진보정당은 해산되고 야당이 무기력한 상황에서, 보수언론이 언로를 장악하고 진보언론이 몸을 사리는 상황에서, 정권과 맞설 조직과 자금을 가진 세력은 민주노총이 거의 유일했기 때문이다.

164- 2015년 9월 22일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함세웅 신부, 김영호 전농 의장 등이 ‘민중총궐기투쟁본부 발족 기자회견’을 열고 “모이자 서울로! 가자 청와대호! 뒤집자 세상을!”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183- 이번 촛불혁명은 30년 전 6월 시민혁명이 키운 노동조합과 농민?통일?빈민?학생 등 이른바 민중세력이 시작한 민중혁명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227- 한 위원장의 자진 출두는 또 다른 상황 반전을 낳고 있었다. 그의 행보는 종교계와 야당의 중재와 협조를 이끌어 내면서 예정된 제2차 민중총궐기 단초를 마련한 것이다. 한 위원장은 평화적 집회를 약속하고 종교계가 이를 보증하고, 경찰은 차벽이나 물대포를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는 촛불혁명 국면에서 또 하나 반전의 순간이다.

237- 두 번째는 제1야당 새정치민주연합이 처음으로 동조했다는 것이다. 제2차 민중총궐기에 문재인 대표를 비롯한 당직자와 국회의원 40여 명이 푸른 머플러를 하고 ‘평화’를 새긴 배지를 달고 집회에 참석했다...비록 야당의원이 ‘박근혜 퇴진’이나, ‘국정교과서 항의’를 주장하지 않고 경찰과 시민의 충돌을 막기 위한 ‘평화 지킴이’ 역할에 머물렀지만 야당이 처음으로 민중총궐기 현장에 함께 했다는 것은 적잖은 의미가 있다.

239- 2015년 12월 19일 오후 제3차 민중총궐기가 열렸다...김영호 전농 의장은 “맨날 해고만 당하지 말고, 박근혜 권력을 우리가 해고시키자”면서 “박근혜 권력을 파면시키자”고 비판했다.

240- 민중총궐기투쟁본부는 그러나 ‘문화제’ 형식으로 치른다며 서울시로부터 광화문광장 사용허가를 받아냈다. 경찰은 집회신고를 안 한 불법집회로 규정했지만, 민중총궐기투쟁본부는 서울시로부터 허가를 받았다며 행사를 강행했다.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는 “당시 서울시의 이 결정은 촛불혁명 과정에서 의미 있는 모멘트였다”고 증언했다.

243- 제3차 민중총궐기의 가장 큰 특징은 민중총궐기가 처음으로 광화문 광장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이는 민중총궐기투쟁본부와 박원순 서울시장의 탁월한 결정이었다. 또 다른 특징은 제2차 민중총궐기에 이어 시위양상이 보다 다양하게 진화했다는 점이다. 폭력과 구호만 연상시키는 정치집회가 ‘문화제’와 같이 평화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치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314- 나중에 만들어진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은 이 행사를(10월 29일) 제1차 범국민행동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이 촛불시위는 퇴진행동 설립(2016년 11월 9일) 이전으로 퇴진행동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촛불시위다.
퇴진행동은 10월 말 대세가 민중세력으로 옮아가고, 촛불이 자연스레 국민 전체에게 확산될 기미가 보이자, 시민사회단체가 ‘같이 하자’고 제안 하면서 결성 움직임이 시작됐다.

322- 주노총 이영주 사무총장은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민단체들은 ‘민중총궐기’라는 단어를 빼라, 2015년 폭력 이미지를 연상시킨다는 거였다. 그러나 우리는 ‘한상균 위원장이 감옥에 있고, 백남기 농민이 죽었다, 우리에게 민중총궐기는 지금 진행 중인 현실인데 그 단어를 뺄 수 없다’고 버텼다. 우리는 분명히 ‘퇴진’ 자를 넣어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는데도, 다음날 또 문제를 제기해 회의를 다시 반복했다. 시민사회단체는 10월 말까지 박근혜 퇴진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자고 했다. 그런데 이미 광장에서는 퇴진을 외치고 있었다. 결국 웹 대자보 등에 ‘민중총궐기’라는 단어를 참여 단체들이 알아서 크기를 정해 넣기로 했다.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한 3개월 동안은 그런 논쟁의 연속이었다.”

324- 퇴진행동 기록기념위원회는 2017년 5월 28일 광화문광장에서 ‘촛불 1주년 대회’를 열고 “부패한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킨 23번의 촛불집회는 모두 시민들의 힘으로 가능했다”고 자축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2017년은 촛불 1주년이 아닌 2주년이다. 최소한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에 맞은 2015년 11월 14일은 기록으로 꼽아줘야 하지 않을까. 기록기념 위원회 관계자는 이를 “전사(前史)로 기록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전사일까. 이런 시대구분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아무도 박근혜와 맞서지 않을 때 제1차 민중총궐기부터 제6차 민중총궐기까지 촛불투쟁을 이어간 세력을 퇴진행동 기록기념 위원회가 중요하게 기록하지 않는 것은 문제다. 퇴진행동이 이러니 국민 대부분도 단지 JTBC의 태블릿PC 보도 이후 촛불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촛불혁명은 ‘최순실의 국정농단’만 동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것은 촛불혁명의 진정한 의미를 축소 왜곡하는 심각한 오류다.

371- 그렇게 막강하게 건재했던 그를 불과 1년 만에 청와대에서 끌어내 감방에까지 넣은 것이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그 극적 반전의 신기루에 도전했던 그들은 누구였는가. 당시 박근혜와 맞서 투쟁한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해고와 비정규직에 내몰리던 노동자, 신자유주의 농업정책에 신음하던 농민, 친일?독재 미화 국정교과서로 가르쳐야 하는 교사, 자신의 신념을 세우려다 탄압받은 진보정당 당원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부모들, 분신과 구속을 겪으며 온몸으로 민주화 역사를 쓴 민주화운동가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 저자소개 ]원희복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부터 기자를 하면서 주로 정치, 행정 및 재난관련 기사를 많이 썼다. <경향신문> 전국부장과 시사주간지 <주간경향> 편집장, <스포츠경향> 종합뉴스부장 등을 지냈다.2003년 한국도시방재학회로부터 재난관련 심층보도에 대한 공노로 언론인상을 받았고,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1994) 을 저술해 2006년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이 수여하는 민주시민언론상 본상을 받았다.『국가가 알려주지 않는 공무원 승진의 비밀』(2011), 『한국인 안전사전』(2013), 『보물선 돈스코이호 쫓는 권력 재벌 탐사가』(2015), 『한▪중 항일혁명가 부부 김찬▪도개손 평전: 사랑할 때와 죽을 때』(2015), 『르포히스토리아』(2016) 등의 책을 냈다.

[ 추천사 ] 함세웅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 

원희복 기자는 ‘기레기’라는 시대적 고발 앞에서 새삼 기자의 초심과 소명, 그리고 신원의식을 깊이 되새기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역사의 수면 아래 있는 빙산의 실체를 찾아가기 위해, 기록을 재검토하고 새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원희복 기자는 시민들이 불법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대선 무효, 박근혜 퇴진을 주장하고 소송을 제기했을 때 책임이 있는 정당의 대표와 지도자들, 지식인들은 대선 불복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조작된 여론에 스스로 저항을 포기하고 국민들의 기본권 수호를 방치한 것을 기록했습니다.

원희복 기자는 무엇보다도 기자들에게는 “왜 기자이며 무엇을 어떻게 보도해야 하는지”, 그리고 정치인들에게는 “왜 정치를 하고 어떤 정치인이어야 하는지” 준엄하게 질책하며 답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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