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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는 지식 판별하는 논술과는 달라”
  • 안데레사 기자
  • 승인 2018.08.02 11:51
  • 수정 2018.08.02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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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프리존= 안데레사 기자] 에세이는 논술처럼 지식을 판별하는 것이 아니다. 주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담아내는 것이다. 아직 에세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미흡한 것 같다. 대학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의견을 글로 표출하는 능력’도 살필 수 있다. 에세이는 보편 지식과 진리의 차이를 발견하고 진리에 다가가는 시도를 다룬다. 인식 내 사실을 탐구한다. 따라서 진리로 일컫는 것이 인간에 있어 진리임을 이해해야 한다. 진리를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 긴 과정을 거쳤다. 진리와 다르게 보편 지식에 관한 엄격한 논의는 필요하지 않다. ‘보편 지식’은 두 단어-보편, 지식-의 결합으로 이뤄져 있다. 의미의 조합은 뜻을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간단히 정리하면 보편 지식은 다수의 타인이 동의할 수 있는 대상의 성질에 관한 의견이다. 이 정의에 맞는 지식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보편 지식은 인간 사회의 의식 속에 존재하며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자주 발견되는 행위의 원인을 파헤치면 보편 지식을 찾을 수 있다. 이외에도 보편 지식을 찾는 방법은 다양하다. 각각의 방법이 사용될 때를 위해 구체적인 소개는 남겨두겠다. 1편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인간은 삶을 산다. 태어남과 죽음의 사이에서 삶을 향한 권리의 주체가 된다. 모든 생각과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삶. ‘산다’는 행위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지만 인식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근원에는 생(生)의 갈망이 있을 것이다. 에세이를 읽고 있는 이에게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이 갈망이 형성되는 과정은 생의 타당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이유를 따지며 아래의 질문에 대해서 논하려 한다.

 삶을 향한 갈망은 그 자체로 타당한가?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타에 의해 태어난다. 태어난 순간, 욕구를 느끼고 충족하는 것이 전부다.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의식을 갖추지 못했다. 이때의 존재는 단지 살아있다. 죽음을 모르기 때문에 계속 산다. 교육과 경험은 이성을 갖게 만든다. 이성의 형성은 자의와 타의의 사이에 있다. 교육 행위는 수동적인 한편, 경험과 인상은 자신의 감각에서 파생되기 때문이다. 이성의 형성과 함께 선택의 자유를 얻게 된다.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적지만, 성찰은 온전히 자아에 속해있다. 죽음에 대해 부분적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죽음을 부를 이유와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다.

 앞의 단계를 지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게 된다. 선택과 자의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중요한 것 몇 가지가 정해져 있다. 의식, 육체, 그리고 존재. 인간에게 허용된 선택지는 존재의 포기(죽음) 혹은 변화(삶)이다. 개인의 사고 수준과 방향이 다른 것을 참작해도 이 상태의 인지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특히, 제한된 인식 능력을 가진 아동이 선택지를 고려하기까지 많은 제약이 있다.

 주된 제약을 아래와 같이 열거했다.

 제약 1. 교육으로 얻어진 지식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교육의 목적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지식과 정보를 가르쳐 가치 있는 삶을 보조하는 것이다. 교육은 삶의 수단의 일종이다. 한편 교육 제도는 구성원을 효율적으로 교육하기 위해 제정된다. 목적과 방법의 이론이 미치는 이중의 영향으로 교육자의 태도와 교육의 방식은 단정적으로 형성된다. 삶과 그 수단이 될 정보를 단정적인 어조로 전달한다. 피교육자는 삶의 소중함, 도덕적이고 좋은 삶을 당연한 것으로 배우고 받아들인다. 이성의 일부마저 교육으로 습득되는 것이기에 삶의 포기를 중립적인 입장에서 고려하기 어려워진다. 중립을 위해서는 성찰이 교육의 반대편에 서야 한다. 하지만 성찰은 교육된 사실을 기반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아 삶을 옹호하게 된다. 교육의 영향은 인간인 자살, 죽음을 접해도 깊게 고려하지 않게 만든다.

 제약 2. 죽음은 책임 없이 실천될 수 없다. 존속은 그 결정에 후회를 남길 수 있다. 그래도 생명을 유지하는 동안 죽을 권리는 자신에게 속한다. 죽음은 다르다. 사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선택과 기회는 소멸한다. 삶, 죽음 모두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포기는 거리껴지는 행위이다. 죽음이 무지하게 여겨질 수 있다. 적절한 선택에는 탁월한 가치 판단 능력이 바탕 되어야 할 것이다. 학문에 이를 정도로 깊은 사색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무거운 주제이다.

 제약 3. 삶을 맹목적으로 찬양해서는 안 된다. 이런 사람은 반대를 의식할 수 없다. 삶이 너무 아름다워 죽음을 보지 않는다. 이성은 절대미(絶對美) 앞에서 마비된다. 삶이 절대미의 경지에 이른다면, 그 인간은 삶에 의문을 갖지 않을 것이다.

 제약 4. 경험도 진지한 사색을 방해한다. 행복한 삶을 최선으로 하는 사람이 넘쳐난다. 관찰자는 무리를 따라 자연스럽게 행복을 목표로 하게 된다. 사람들은 행복의 정확한 개념을 모른다. 그저 행복 혹은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믿는다. 단어 그 자체가 품은 성질로 인해 행복의 인상과 관념은 좋게 형성될 운명을 가진다. 그리고 인간의 궤도는 죽음이 아닌 삶, 행복한 삶을 향한 여정에 오른다.

 위의 제약을 읽어도 죽음에 대해 고민하기는 어렵다. 사색하는 인간 혹은 죽음의 직전에 놓인 인간만이 삶과 죽음을 저울질할 수 있다. 서머싯 몸이 쓴 <인간의 굴레>는 이를 실천한다. 소설은 청년 필립이 서른에 이르기까지 겪은 삶을 서술한다. 신체와 정신은 사회의 굴레에 얽매여 있다. 제약 속에서 고통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인생, 죽음, 그리고 사랑, 신앙의 문제를 질문한다. 책임과 권리는 필립에게 있지만,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은 죽음뿐이었다. 필립은 삶과 죽음을 충분히 고려했고 끝내 삶을 선택했다. <인간의 굴레>는 자전적 소설이다. 작가의 생각을 진솔한 문체로 담아 그대로 옮겼다. 이 소설은 삶에 의문을 가지는 이들에게 표지가 된다.

 삶이 처한 상황은 인간이 살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을 진지하게 탐색하는 이들에게는 삶이 당위가 아닐 수 있다. 본능이 삶을 지향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인식 내에서 반(反) 행위를 떠올릴 수 있는 본능은 절대적이지 않다. 인간은 본능에 대항할 수 있다. 본능은 자유 의지 뒤의 기준이 되어야 마땅하다. 인간은 제약과 본능을 넘어 죽음에 대해 고민해야 하고 이 질문 후에 삶이 진정으로 타당한 것인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여담으로, 글쓴이 본인도 경계에서 고민해왔다. 일단 살아가는 것에 뜻을 두고 있다. 앞으로의 선택을 단정 짓지는 않았으며, 삶을 포기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 결정으로 삶은 더 가치 있게 변했다. 다음 글에서는 살기로 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다.

안데레사 기자  sharp229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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