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덕이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인데 겸양이 그 첫째 계단입니다. 이 첫째 계단에 오르면 그 다음에는 위로 올라가기가 쉬운 것이지요.

날마다 죽자
조선일보 8월 3일자에 기독교의 대표적 목회자의 한사람인 이종표 목사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는 “날마다 죽어라” “김치가 되려면 배추가 죽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이종표 목사는 일선 목회자로 활동하면서도 ‘별세(別世) 신앙’이란 자신만의 목회철학을 확립한 목사입니다.

‘별세 신앙’이란 성경 <갈라디아서>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이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구절의 정신을 우리말로 옮긴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말하는 것이지요.

죽어야 사는 이치는 물질세계 뿐 아니라 진리세계에서도 공통적일 것입니다. 김치가 되기 위해서는 배추가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소금에 잘 절인 배추가 맛있는 김치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가에 입문하고자 하는 초심자는 한 시기까지 사찰에서 땔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 불목하니를 시켰던 이유도 바로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유교에서는 나이 60을 이순(耳順)이라고 하지요. 이순은 모든 것을 들을 때에 순해져서 마음도 화(和)하고 기운도 화한 자리를 말합니다. 자기를 죽이고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대하면 화하는 그 자리가 이순 자리고 죽어서 사는 자리가 아닐까요? 그래서 옛 성현들이 “악장제거무비초(惡將除去無非草) 호취간래총시화(好取看來總是花)”라 하셨습니다. 즉, ‘악을 장차 제거함에 풀 아님이 없고, 좋게 보니 다 꽃이더라.’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현은 우리보고 이처럼 ‘날마다 죽자’고 하십니다. 죽어야 산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나를 죽이느냐, 살리느냐’를 결정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어야 합니다. 어제 하던 나쁜 습관을 끊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어제처럼 살기 바랍니다. 그 사람들이 오늘도 어제와 같이 살기를 바라는 이유는 어제의 나에게 안주(安住) 하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 것이냐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지 않으면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이 순간에 우리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영원히 우리를 다시 창조해 나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거나 누리고 있는 것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지금 가진 것들 즉, 재색명리(財色名利)와 안일(安逸), 습관과 고집, 그리고 탐욕과 오만 등등, 다 내려놓지 않으면 우리는 거듭 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고집스러웠던 내가 그 고집을 버린다면 이는 곧 내가 변화됨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나를 죽이면, 이제까지의 나와는 다른 찬란한 인생으로 탈바꿈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가르침이고, 서가모니와 우리 소태산(少太山)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곧 ‘나를 살리느냐, 죽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버려서 지금의 나를 죽이고 다른 나로의 변화를 말씀 하신 것이 아닐까요?

원불교(圓佛敎)의 2대 종법사를 역임하신 정산(鼎山) 종사님의 법어(法語) <원리편>에 진급(進級)하는 사람과 강급(降級)하는 사람에 대한 법문(法門)이 나옵니다.

「진급하는 사람은 인자하고 겸손하고 근실하며, 공(空)한 마음으로 굴기(屈起) 하심하고, 경외심(敬畏心)으로 남을 공경하며, 덕화(德化)로써 상하를 두루 포용하고, 공부와 사업을 쉬지 않는 사람이며. 강 급 하는 사람은 성질이 거칠고 공경심이 없으며, 시기하고 질투하며, 자기의 욕심만 채우려 하고, 학식 재산 권세 기술 등 한 가지라도 능함이라도 있으면 상(相)을 내고 자만자족(自慢自足)하는 사람이니라.」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그의 주변으로부터 황제등극(皇帝登極)을 권유받았지만 이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헌법에 따른 8년 중임의 대통령임기를 마치고 퇴임했지요. 후임 대통령은 부통령으로 있던 아담스였습니다. 워싱턴이 퇴임한지 채 1년도 안 된 시점에서 신대륙에 대한 이권을 노린 프랑스가 군대를 동원해 무력도발을 일으켰습니다.

아담스 대통령은 이런 위급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할 전략가는 워싱턴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여러 가지 의논 끝에 군사적 대응만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판단한 워싱턴은 즉석에서 토벌군 사령관의 직무를 수락했습니다. 이때 아담스 대통령은 워싱턴의 계급 문제로 고심했습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계급이 중장이기 때문이었지요.

이 뜻을 간파한 워싱턴은 특별예우를 사양하고 중장 계급을 달기로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현역으로 복귀한 워싱턴은 프랑스군을 토벌해 미국의 국기(國基)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명예를 생명보다 중히 여기는 참군인의 자긍심(自矜心)과 겸양지덕(謙讓之德)의 결과라 해야 할 것이 아닌지요?

자긍심은 스스로 긍지를 느끼는 마음입니다. 일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사람이 참모총장 휘하에서 특수부대 지휘책임을 맡는다는 것,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국가의 존망(存亡)이 걸려 있는 위급상황에서는 계급이나 직책 따위가 아무런 고려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결연한 의지를 표명했던 워싱턴, 그는 확실히 나를 죽이는 위대한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선심을 쓰고도 욕을 먹습니다. 그러나 겸양하는 사람은 돈이 없어도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겸양은 검(劍)보다 강합니다. 덕의 빛이 크나 겸양으로 덮지 아니하면 오래가지 않아 소멸됩니다. 모든 덕이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인데 겸양이 그 첫째 계단입니다. 이 첫째 계단에 오르면 그 다음에는 위로 올라가기가 쉬운 것이지요.

겸양은 하늘나라에 보물창고를 발견하는 눈이요, 그 창고를 여는 열쇠입니다. 그런 사람은 칭찬을 받았을 때가 아니고 꾸지람을 들었을 때 겸양함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겸양한 사람은 남을 비판하지 아니하며 또한 비판하는 소리도 듣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군(魔軍)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겸양이요, 진리가 가장 미워하는 것은 교만(驕慢)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죽자는 것은 진리와 사람 앞에 겸양한 생각과 태도를 가지라는 진리의 말씀이 아닐 까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8월 7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관련기사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