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 이명수 기자] ‘돌베개’하면, 떠오르는 인물 그 제목으로 자서전을 쓴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 장준하 루도비코 선생이다. 이를 기념한 14일 광복절 하루 앞두고 장준하100년 위원회가 인천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에서 평화의 길, 독립의 길을 갖였다.

장 선생은 일제강점기 광복군으로서 활약했고, 정치가(국회의원)로, 언론인(돌베개)으로, 사회운동가로, 또한 기독교인(조선신학교)으로 살았다. 특별히 장 선생의 사인(死因)은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법을 제정하여 사인을 규명하는 일은 정의를 구현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일에 해당한다.

역사관으로 개조된 서울 서대문형무소 옥사 복도에 장준하 선생의 대형 사진이 내걸렸다. 복도 양쪽에는 고인의 친필 원고와 사진, 기록, 막사이사이상 상패, 영상물들이 빼곡하다. 

한편, 더불어민주당 김해영(부산 연제구) 의원이 14일 '장준하 특별법'의 국회 통과를 촉구했다. "2016년 8월 특별법안을 발의했지만 2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국회 상임위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다"며 "장준하 선생 탄생 100돌인 올해에는 반드시 법안이 통과돼 제대로 된 진실규명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준하 선생은 독실한 기독인

1944년 7월 김희숙 여사에게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일본군에 징병된 남편 장준하(1918∼1975)의 편지였다. 편지엔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해 이긴 뒤 돌베개를 베고 잤다는 성경 말씀이 인용돼 있었다. 김 여사는 남편이 징병되기 전 “어느 날 편지에 성경을 인용하는 내용이 있으면 그땐 내가 일본 군영을 탈영한 것으로 알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난 장준하는 1944년 1월 일본군에 징병됐다. 일제로부터 감시받고 있던 부친 장석인 목사와 정신대에 끌려갈 위기에 있던 아내의 안전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일본군 생활은 길지 않았다. 6개월 만에 탈영해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로 향했다. 그리곤 마지막 광복군으로 입대했다.

올해는 장준하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총회는 오는 27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 2층에서 ‘장준하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린다. 기장은 예배에 앞서 두 달에 걸쳐 회보에 장준하에 대한 글을 올렸다. 지난달엔 ‘장준하와 기장, 그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인, 민주화운동가로 잘 알려진 그의 신앙적 면모를 재조명했다.

장준하는 1941년 일본의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부친 장 목사는 아들에게 신학을 공부하라고 권했다. 장준하 역시 신학에 뜻을 두고 이듬해 일본신학교로 전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장차 한국교회와 신학계의 기둥으로 서게 될 동료들을 만났다. 평생의 길동무가 된 문동환 문익환 목사를 만난 곳도 이곳이다.

문대골(79) 목사는 14일 “일본신학교 시절 장 선생은 교회학교 교사로, 순회 전도 강사로, 계몽요원으로 헌신적인 선교활동을 감당했다”고 전했다. 문 목사는 1971∼72년 ‘씨알의 소리’ 출판부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편집위원장이던 장준하와 함께 일했다.

장준하의 사역은 광복군 시절에도 계속됐다. 중국 임천의 한국광복군 간부훈련소에서는 훈련반원들 중 기독교인들을 모아 기독자모임을 이끌었다. 중경 임정에서도 기독교 예배 모임을 주관했다. 백범 김구는 이런 장준하를 ‘장 목사’로 불렀다. 농담 섞인 애칭이었지만 장준하는 실제 중경에서 북쪽으로 15㎞ 떨어진 토교라는 곳에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로 섬겼다.

장준하가 토교에 가게 된 계기가 있다. 목숨을 걸고 일본군에서 탈영해 중경에 도착했지만 임정 지도자들은 조국 광복은 뒷전이고 파쟁만 일삼았다. 장준하는 임정 지도자들에게 “사경을 헤쳐 왔는데 지금은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다. 다시 일본군에 들어가 항공대에 자원해 중경(임정) 폭격을 자원하고 싶다”는 폭탄 발언까지 했다. 김구는 장준하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지도자들과의 마찰을 염려해 그를 토교로 보냈다. 장준하는 광복군 활동을 하면서 토교에 있던 동지들과 함께 토교한인교회를 세웠다. ‘한교(한국교포)회관’ 강당이 예배당이었다. 그때가 1945년 2월, 광복 6개월 전이었다.

광복과 함께 귀국한 그는 1949년 2월 한국신학대에 입학해 그해 6월 졸업했다. 일본신학교에서의 수학한 경력이 인정돼 한 학기 만에 졸업이 가능했다. 장준하가 직접 작성해 ‘세계기독교연차대회’에 제출한 ‘1945년 한국 기독교 실태보고서’도 한국신학대 졸업반 편입에 큰 역할을 했다. 이 보고서는 임정 시절 세계교회협의회의 모체가 된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위원회의 요청을 받은 김구가 장준하에게 작성케 한 것이다.

문 목사는 “장 선생은 평생 진리를 좇아 살았다”며 “참이라는 가치가 사라져가는 현대사회에 역사 속 장 선생을 다시 살려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 목사는 기념예배 때 설교를 통해 장준하의 삶과 신앙을 기억하고 추모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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