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을 이루는 사람은 그 서원을 이루기 위해 마음속에 늘 ‘간절함’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간절한 바람

우리의 간절한 바람을 서원(誓願)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을 기어코 달성하겠다고 하는 서약 적(誓約的)인 결의를 말하지요. 발원(發願)은 어리석고 나쁜 마음을 모두 버리고 부처님처럼 크고 넓고 맑은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다짐하는 종교인의 바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종교인에게는 누구나 원(願)이 있습니다. 원은 우리의 삶에 목표를 두고 중심을 이루며, 지혜와 용기가 나오는 원천입니다. 그 가운데 불자(佛子)가 갖는 대표적인 근본 원이 4가지 있습니다. 그것을《사홍서원(四弘誓願)》이라고 합니다.

하나, 가엾은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둘, 끝없는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셋, 한없는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넷, 위없는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아마 이처럼 큰 서원은 없을 것입니다. 온갖 어리석음 속에서 한없이 어려운 괴로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올바른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 맑고 밝고 훈훈한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 불보살(佛菩薩)입니다. 이 서원력으로 인하여 모든 종교인은 번뇌에서 벗어나고, 악도를 벗어나며, 중생을 제도하여 불국정토(佛國淨土)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서원은 자신의 이익만을 얻으려는 욕심이 아닙니다.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려는 생활태도입니다. 원(願)은 곧 희망(希望)이며 이상(理想)입니다. 사람이란 참된 희망과 영원한 이상을 가짐으로써 전진이 있고 향상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상과 희망이 크면 클수록 그 활동과 노력도 큰 것이요, 그 노력이 클수록 그 결과도 큰 것입니다.

그러나 원을 세우기는 쉽지만 지속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 서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자기가 세운 원대로 행할 수 있는 각오가 서야 합니다. 정성이 부처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지성여불(至誠如佛)>을 서원을 이루는 방법이라 생각하고 일직 심으로 달려갑니다.

이렇게 서원은 간절한 바람에서 시작됩니다. 한 청년이 소크라테스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저는 지식을 탐구하러 왔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되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가?” “예? 그냥 배우면 안 되는 것입니까?”

소크라테스는 청년을 바닷가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청년에게 바닷물이 턱에 찰 때까지 걸어가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소크라테스는 청년을 무지막지하게 물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청년은 숨이 차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고개를 물위로 내밀었습니다.

그때 소크라테스가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자네가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공기입니다.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청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네가 물속에서 공기를 간절하게 갈망했던 것처럼 그렇게 지식을 갈구한다면 지식은 네 것이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꿈이 있고 서원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꿈을 이루고 서원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서원을 이루는 사람은 그 서원을 이루기 위해 마음속에 늘 ‘간절함’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 십 번씩 그 서원을 되새기고, 그 서원을 위해 《지성여불》의 정신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서원은 간절한 바람에서 시작됩니다. 때로는 목숨까지 걸 정도로 간절해야 합니다. 그 정도로 간절함 없이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실패와 절망은 간절함이 부족하기에 찾아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진실 중의 하나가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입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사항은 ‘바라면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입니다.

불보살과 중생(衆生)의 차이는 마치 큰 나무와 돋아나는 새싹과 같은 것입니다. 새싹이 크면 작은 싹도 큰 나무로 자라납니다. 마찬 가지로 중생도 서원을 세우고 일구월심(日久月心) 달려가면 중생도 불보살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하려고 하면 못 될 일이 없고 안하려고 하면 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려고 하는 그 마음을 우리는 신근(信根)이라고 합니다. 그 신근의 심천(深淺)을 한 번 살펴볼까요?

첫째, 낙엽 같은 신근입니다.

아무 주견(主見)없이 여러 학설에 끌리고 여러 사람의 주의 주장에 끌려서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려 자행자지(自行自止)하다가 자신을 그르치는 근기(根機)입니다.

둘째, 나무뿌리 같은 신근입니다.

정당한 법(法)에 믿음이 서서 약간의 경계에는 흔들리지 않으며 큰 경계(境界)를 당하면 흔들리기는 하나 타락하지 않는 정도의 근기입니다.

셋째, 태산교악(泰山喬嶽) 같은 신근입니다.

믿음이 깊어서 어떠한 역경(逆境) 난경(難境)을 당할지라도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며, 일체 행동을 하되 언제나 양심이 주장하여 죄고(罪苦)에 빠지지 않는 정도의 근기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신근은 과연 어디일까요? 마음에 발원이 없고 향상코자 노력함이 없는 사람은 곧 살았으되 죽은 사람이나 마찬 가지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최후의 일념을 청정히 챙기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일은 최초의 발원을 크게 세우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이 비슷합니다. 그러나 서원과 욕심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서원은 나를 떠나 공(公)을 위해 구하는 마음이요, 욕심은 나를 중심으로 사(私)를 위하여 구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간절한 바람을 세우고 공을 위하여 정진(精進) 정진 또 정진하면 어떨 까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9월 7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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