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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다 이룬 개혁, ‘만민공동회’ 발생에 기여한 <독립신문>
  • 김현태 기자
  • 승인 2018.09.14 12:12
  • 수정 2018.09.14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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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포털 갈무리

[뉴스프리존= 김현태 기자] <독립신문>에 의해 여론이 모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시민사회가 출현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1898년 3월부터 12월까지 3차에 걸쳐 열린 만민공동회다.

이전,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발발한다. 쿠데타의 형식으로 일어난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주동 인물들은 모두 죽거나 망명하는 결과를 낳는다. 갑신정변 당시 말기 왕조의 봉건적 모순은 심화되고 조정은 청나라 군대가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정변의 주동자들은 내부적으로 개혁과 개화를 도모하고 외부적으로는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개화를 앞당기려 했던 것이 오히려 개화를 늦추는 결과를 불러 왔다. 청나라의 간섭은 더욱 심해지고 정변 이후 10여 년 간은 조선에서 개화를 논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갑신정변은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앞당기려 한 선구적 사건이라고 높이 평가된다.

반면 다른 한 쪽에선 개화파를 친일파로 단정 짓고 사건을 단지 친일파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또 일본의 군대를 빌리는 등 외세에 의존해 정변을 일으킨 것을 한계점으로 지적한다. 박찬승<인문대ㆍ사학과> 교수는 “당시 정변 주동자들의 주체적 역량이 모자랐다”며 “정변에 앞서 계몽운동을 통해 자신들에게 동조해 줄 세력을 모아야 했다”고 말했다.

갑신정변 이후 주동자였던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나 그 후 각기 다른 행보를 택한다.김옥균은 일본에 머물며 일본의 도움을 받아 다시 조선의 내정을 개혁할 기회를 노리나 민씨 정권은 자객으로 위협한다.

그러다 김옥균은 청나라 조정의 실권자인 이홍장과 만나 중국과 일본이 제휴해 조선의 내정을 개혁할 것을 제안하기 위해 상해로 간다. 그 때 동행한 인물 홍종우는 민씨가 보낸 자객이었다. 김옥균은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총살 당한다.

박영효가 적은 김옥균의 비문에는 ‘비상한 시대에 비상한 재주를 타고 태어나 비상한 일을 하다가 비상하게 죽은 사람’이라 적혀있다. 박 교수는 “이 비문은 김옥균을 적절히 묘사한 글이라 할 수 있다”며 “급한 성격 탓에 갑오개혁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최후를 맞은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박영효는 1894년 말에 귀국해 갑오개혁에도 참여한다. 그는 우리나라의 지방제도를 개혁하고 일본으로 150여 명의 국비유학생을 보내는 등 개혁에 애쓰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박영효는 갑신정변 이후에도 끊임없이 권력을 장악하는 쿠데타를 꾀하고 일제 식민지화 이후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작위를 받고 일제에 협력하는 세력으로 변질한다. 박 교수는 “이 때문에 박영효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 힘들다”며 “그는 인생에 친일이라는 오점을 남겼다”고 말했다.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해 의학공부를 한다. 1895년 당시 대원군과 대립하던 김홍집 정권의 끊임없는 요청에 귀국하나 조선인으로써 관리직을 맡는 것은 거부하고 실권이 없는 한직인 중추원 고문에 머문다. 이후 독립신문을 만들고 독립협회를 창립해 고문을 맡는다. 박 교수는 “서재필은 당장 필요한 게 권력을 장악하는 정변이 아닌 사람들을 계몽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며 “그가 활동을 지속하지 못하고 2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 아쉽다”라고 말했다.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의 정치활동 중 하나로 시민, 단체회원, 정부관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한 대규모 집회다. 만민공동회는 크게 세 차례 열렸다. 제1차 만민공동회는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17만으로 추정되는데, 이날 만민공동회에 참석한 인원은 1만 명에 달한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 등 배재학당과 경성학당 학생들이 러시아의 재정간섭을 규탄하는 내용의 대중강연을 했다. 이후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반대 건이 논의되었으며,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 노한은행의 철거를 요구했다.

▲사진: 포털 갈무리

이틀 후, 서울 남촌에서 평민 수만 명이 다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절영도 조차 반대, 러시아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의 철수가 결의되었다. 대대적인 운동에 정부는 만민공동회의 주장에 따라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거부했다. 며칠 이내에 결의되었던 대로 러시아는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의 철수를 통고했고 노한은행도 철폐했다. <독립신문>은 이 과정에서 만민공동회와 관련된 모든 사실을 보도하고 만민공동회를 지지하는 논조의 기사를 실었다.

10월에 열린 두 번째 만민공동회는 12일 동안 철야로 열렸다. 고종을 독살하려 한 범인을 그의 가족을 함께 사형시키는 연좌법이 부활되려던 때다. 이날 만민공동회에서는 부당한 법률을 제정하려는 수구파 정부를 퇴진시키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역시 임금을 독살하려 한 범인이라도 법치주의에 충실해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만민공동회와 계속된 공방을 벌이던 고종은 시위군중의 압박에 의해 결국 독립협회 인사인 박정양 등을 등용해 개화파 정부를 만들었다.

제3차 만민공동회는 의회설립을 목표로 해 대표 위원을 선출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의회 설립 하루 전, 고종은 친러 수구파들에게 자신이 폐위된다는 거짓 보고를 받고 독립협회를 해산시킨다. 이로 인해 독립협회 간부 대다수가 체포되었다. 시민들은 17일 동안 철야로 지도자 석방을 위해 투쟁했지만 결국 고종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불법화하고 해체령을 내렸다.

만민공동회는 서울 인구의 상당수가 참여한 최초의 근대적 대중운동이자, 조선이 군주국가를 벗어나 민중이 주권을 갖는 근대사회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 포털 갈무리

김현태 기자  kimht100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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