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비평>에 이 글을 쓴 게 1991년 가을이니 햇수로 벌써 27년이 지났다. 1988년 말부터 친일문제에 매료돼 하루 세끼 밥 먹는 것 말고는 내 머리 속은 온통 ‘친일파’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월급의 절반을 털어서 인사동 고서점과 청계7~8가 고서점을 뒤지며 친일파 관련 자료를 사 모으던 때였다. 한 마디로 친일파에 미쳐서 반 정신줄을 놓고 살던 때였다.

필자가 <역사비평> 1991년 가을호에 기고한 글로 파장이 적지 않았다.

그 무렵부터 간간이 <월간 말> 등에 친일파 관련 글을 기고하면서 만나게 된 분들은 독립운동가나 그 후손들이었다. 친일파 얘기를 들으려면 이분들을 만나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독립운동가 한 분이 얘기 끝에 독립유공자 포상의 문제점을 들려줬다. 듣고 보니 놀라웠다. 그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문제를 취재하였는데 우연히 <역사비평> 편집장과 대화하다가 이 얘기가 나와서 1991년 가을호에 100매 분량의 글을 싣게 됐다. 당시 한겨레에서 문화면 톱기사로 보도하는 등 적잖은 반응이 있었다. 얼마 뒤에는 국회 국감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되기도 했다.

이후로도 나는 틈나는대로 일간지나 잡지 기고를 통해 독립유공자 선정(심사) 과정에서 빚어진 문제점을 지적해왔다. 취재과정에서 보훈처와 대화할 기회를 가졌으나 단 한 번도 흔쾌히 응한 적이 없었고, 제대로 된 자료를 제공한 적도 없다. 그간 내가 모은 자료들은 유족들이나 다른 채널을 통해 입수한 것이다. 보훈처의 이런 행태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공적심사 자료는 보훈처 담당자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주권자인 국민이나 유가족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공개해 보여야 하는 공적 기록이다. 보훈처는 이제라도 공적심사 자료를 마이크로필름, 혹은 PDF로 제작하여 공개하기 바란다. 투명한 행정은 보훈행정에 신뢰를 가져다 줄 것이다.

91년 가을호 <역사비평>에 글을 실은 후 수많은 독립유공자 및 그 유족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 많은 기자들 가운데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파온 기자는 필자 혼자가 아닌가 싶다. 그 중에서 아직도 잊히지 않는 분이 한 분 있다. 그 분은 조부의 독립투쟁 공적을 포상받기 위해 보훈처에 신청을 했다가 막판에 훈장을 빼앗겼다. 그의 조부 대신 포상을 받은 사람은 조부와 동명이인의 종친이었다. 관련 서류를 검토해보았더니 한 눈에 봐도 보훈처 공무원의 장난질 결과였다. 나는 이런 내용을 잡지에 기고했는데 바로잡아지지 않았다. 당시 그 후손의 나이는 60대 중반이었는데 어쩌면 한을 안고 타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일로 보훈처 담당자와 설전을 벌이는 등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나로선 국가조직인 보훈처를 이길 순 없었다.

지금 집필중인 책이 끝나면 해묵은 보따리를 꺼내 그 억울한 사연을 다시 살펴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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