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생과 사를 갈라놓고 넘을 수 없는 벽을 쌓습니다. 현자는 이릅니다. “연못에 연꽃은 무심히 피고 지고 반복하듯이, 

죽음 저 끝

우리 <덕산재(德山齋)> 창밖으로 광대한 벌판이 펼쳐집니다. 제 25호 태풍 ‘콩레이’가 지나가자 그 드넓은 벌판으로 파란 하늘이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문득 저 파란 가을 하늘에 한 점의 흰 구름이 두둥실 떠 오네요. ‘어! 저 구름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가?’ 하는 생각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불교와 관련한 한자성어로는 <一切皆苦. 見性悟道. 諸行無常> 등의 용어들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명제로써 무상(無常)을 설명합니다. 제행무상은 불교의 근본교의를 나타내는 ‘3법인(三法印)’의 하나로, 모든 것은 ‘생멸변화(生滅變化)’하여 변천해 가며 잠시도 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마치 꿈이나 환영(幻影)이나 허깨비처럼 실체가 없는 것을 말하지요.

즉,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매순간마다 생멸 · 변화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항상불변(恒常不變)한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실상(實相)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일체는 무상한데 사람은 상(常)을 바랍니다. 거기에 모순(矛盾)이 있고 고(苦)가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무상은 고의 전제입니다. 무상한 까닭에 고인 것이지요.

또 현실을 그와 같이 인식하는 것을 무상관(無常觀)이라고 하며, 무상의 덧없음은 ‘몽환포영로전(夢幻泡影露電)’ 즉, 꿈 · 환상 · 물거품 · 그림자 · 이슬 · 번개에 비유되어 불교적 인생관의 특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무상관은 단순히 비관적인 덧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상(相)에 대하여 비관하거나 기뻐하는 것 자체가 상이며, 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서산대사(西山大師 休靜 : 1520~1604)의 열반송(涅槃頌)은 언제 읊어도 가슴을 후련하게 해줍니다. 서산대사께서 85세의 나이로 묘향산 원적 암에서 칩거(蟄居)하며 많은 제자를 가르치시다가 운명하기 직전 읊으신 다음 많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잠든 듯 입적 하셨다는 게송(偈頌)입니다.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

「生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스러짐이라./ 뜬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나고 죽고 오고 감이 역시 그와 같다네.

천 가지 계획과 만 가지 생각이/ 불타는 화로 위의 한 점 눈(雪)이로다./ 논갈이 소가 물위로 걸어가니/ 대지와 허공이 갈라지는구나./ 삶이란 한 조각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구름이 스러짐이다./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 죽고 살고 오고 감이 이와 같도다.」

불가에선 사람이 죽으면 왕생극락을 발원하는 염불을 하는데, 그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여! 날 때는 어느 곳에서 왔으며, 갈 때는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生)는 것은 한 조각구름이 인 듯 하고, 죽는 것은 한 조각구름이 스러지는 것, 뜬 구름 자체는 본래 자체가 실이 없나니, 죽고 사는 것도 역시 이와 같도다. 그러나 여기 한 물건이 항상 홀로 드러나 담연(淡然)이 생사를 따르지 않네.”

본래 생과 사는 둘이 아닙니다. 단지 헌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도리를 모르니 스스로 생과 사를 갈라놓고 넘을 수 없는 벽을 쌓습니다. 현자는 이릅니다. “연못에 연꽃은 무심히 피고 지고 반복하듯이, 인생도 생사의 바다를 무심히 오고간다. 물결은 여전히 출렁이건만 외로운 돛단배는 갈 길 잃고 바람 따라 밀려간다.”

저는 벌써 80세나 되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준비를 하여야 될 것 같아 벌써 영정사진을 촬영하여 준비해 두었습니다. 저는 평균수명을 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죽음에 대 한 두려움은 거의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은 나고 자라면서 늙고 병들어죽는 생로병사의 법칙을 벗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류가 이 지구상에 300만년 이전부터 살아 왔다고 합니다. 그 긴 세월에 비하 면 우리들 인생은 아주 잠시잠간 이 땅에 머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모두가 영원 히 살 것같이 남들보다 많은 돈을 벌려고 기를 씁니다. 그리고 남들보다 높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별의 별 수를 다 쓰며 일평생을 살다갑니다.

재색명리(財色名利)! 그거 다 허망한 것입니다. 인생은 뜬구름 같이 잠시 이 세상에 머물다 간다고 하는데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고려 공민왕 때 나옹대사가 78세 입적(入寂) 할 때 읊으신 열반송이 있습니다. “칠십 팔년 고향으로 돌아가니, 이산하 대지 온 우주가 다 고향이네, 이 모든 삼라만상 내가 만들었으며(刹刹塵塵皆我造), 이 모든 것은 본시 내 고향이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살아 있는 세상을 이승이라 하고, 죽어서 가는 세상을 저승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승과 저승을 다른 세계 같이 생각하고 있으나, 다만 그 몸과 위치를 바꿀 따름이요 다른 세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생사는 불보살들이나 중생이나 같습니다. 그러나 불보살들은 그 거래에 매(昧)하지 아니하고 자유로 합니다. 그리고 범부중생(凡夫衆生)은 거래에 매하고 부자유한 것이 불보살과 다른 것입니다. 생사대사라 했습니다. 그 생사를 자유로 할 것인가 부자유로 거래할 것인가는 오로지 우리 자신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생사공부를 하지 않으면 죽음에 다다라 사(死)의 공포를 이겨내지 못할 것입니다.

수도 인이 구하는 것은 마음자유, 죄복임의(罪福任意), 생사초월(生死超越)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통해 이 공부를 해 두지 않으면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내려오지 못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고통의 바다를 헤어나지 못합니다. 설사 이 수레바퀴에 실려 또다시 다음 생을 맞으면 어찌 그 고통의 바다를 벗어나겠습니까?

죽음 저 끝에는 또 지금의 삶과 같은 생애(生涯)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래도 조금 이생보다 나은 삶을 살려면 부지런히 수행과 공덕을 쌓아야만 이 고해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 까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10월 12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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