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 김현태 기자] 조선 사회에서 노비는 사극 등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수많은 양인들 가운데 어쩌다 한 번 등장할 정도로 희소한 존재가 아닌,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박인수는 중추부지사를 지낸 신발의 노비였지만 학문 활동으로 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중종 대의 문신으로 공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지낸 반석평 역시 태생은 박인수와 마찬가지로 미천한 노비였다.

비록 벼슬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시문에 능해 선비들의 인정을 받은 노비들의 사례 역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16세기 조선 문단을 풍미했던 시인 백대붕은 선박을 제조·관리하고 물자를 수송하는 전함사의 관노였고, 선조 때 활동했던 시인 모임인 풍월향도의 맹주격인 유희경은 “주인을 충심으로 섬기는” 사노였다.

이방원의 사람이 되고 싶은 노비 목인해

1408년 11월에 일어난 이 사건은 주모자가 목인해였고, 핵심 인물인 조대림은 개국공신 조준의 아들이며, 태종의 적차녀 경정공주의 남편이었다.

그는 1387년 태생으로 당시 나이가 22살이었는데, 사리 판단이 빠르지 못하고 명민한 구석도 별로 없었다. 목인해는 원래 이성계의 적삼녀 경순공주의 남편인 이제의 노비로, 애꾸눈이고 활을 잘 쏘았다.

목효지는 목인해의 일족으로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부모가 노비로 몰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다.

이와 같은 추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로서 젊은 목효지가 세종 23년에 올린 상소문을 보면 한문에 능했으며 그를 바탕으로 여러 풍수서적들을 읽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태어나서부터 노비였다면 한문을 익힐 여유가 없었을 것이고 더구나 당시에 구하기 힘든 풍수서적을 다양하게 읽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목효지가 처음부터 노비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문종과 단종 때 그는 나름대로 권력다툼에 줄을 대려다 세조의 미움을 받아 세조가 즉위하자마자 세조에 저항하였던 다른 대신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한 사실이다. 

이제가 죽은 후, 태종(이방원)을 섬겨 공을 세우고 옆에서 시종한 덕분에 호군의 벼슬을 받았다. 그의 아내가 조대림의 여종이었기 때문에 목인해는 조대림의 집에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목인해는 조대림의 어리석음을 이용하여 공을 세우려는 흉계을 꾸몄고, 그것은 조정과 왕실을 큰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대담하게도 그는 조대림이 반역을 도모하는 것처럼 꾸미고 그를 고발하여 공을 세워 벼슬을 얻으려는 계획을 짰다. 우선 조대림을 찾아가 태조의 부마인 흥안군(이재)이야기로 음모의 일단을 풀어냈다. 즉, 흥안군이 부마로서 금병을 맡았지만 준비를 못한 탓에 잡혀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였다.

흥안군는 금위군을 지휘하는 우군절제사로 있다가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일파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 목인해는 그 사건을 들먹여 조대림에게 겁을 주었다.

조대림이 겁을 먹고 쉽게 걸려들자, 이번에는 이숙번에게 달려갔다. 이숙번은 의심이 많고 적이 많은 사람으로 조대림이 군사를 일으켜 이숙번과 권규 등을 죽이고 왕실을 도모한다는 그럴듯한 말에 속아 넘어간 이숙번이 태종에게 그 말을 전하니, 태종은 목인해를 불러 물었다.

"네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대림은 아직 어린 나이인데 감히 어떻게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겠느냐? 만약 그렇다면 주모자가 있을 것이다."

▶ 지은이소개_ 김종성: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에서 방문학자로 활동했다. 월간 《말》의 동북아 전문기자로 동북공정, 북한 핵문제 등 동아시아의 이슈에 대해 역사적 관점이 내재된 기사와 평론을 썼고, 〈오마이뉴스〉에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 읽기’ 코너를 장기 연재하고 있다. 또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과 《민족 21》 등 여러 매체에도 글을 싣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Sericeo에서는 기업인들에게 한국사를, 삼성인력개발원에서는 외부 강사로 삼성그룹 신입사원들에게 역사를 강의하고 있으며, 교통방송TBS과 기독교방송CBS의 역사 코너에 출연하고 있다.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사업단의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왕의 여자》, 《한국사 인물통찰》, 《철의 제국 가야》, 《조선을 바꾼 반전의 역사》, 《동북아 코드》, 《동북아 어떻게 볼 것인가》, 《조선사 클리닉》, 《최숙빈》, 《동아시아 패권전쟁》 등이 있다.

▶ 본문 중에서

남의 집 머슴인 고유가 ‘제가 장기에 지면 좌수 어른의 머슴이 되겠습니다’라고 제의한 데서 드러나듯이, 머슴은 자신의 주인을 임의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노비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주인과 머슴은 고용계약을 매개로 묶였다. 그런 까닭에 계약만 해소된다면 머슴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또 머슴살이를 하던 고유가 과거에 응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머슴의 법적 지위는 일반 양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_ 33쪽, <글 읽는 노비, 박인수> 중에서

노비가 주인과 사회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느냐는, 개별 노비가 노예에 가까운지 농노에 가까운지에 크게 좌우되었다. 송씨의 여종처럼 솔거노비로서 노예에 가까울 경우에는 주인이 함부로 대하기 쉬웠지만, 박인수처럼 외거노비로서 농노에 가까웠을 경우에는 주인이 함부로 대하기가 힘들었다고 볼 수 있다. _ 46쪽, <엽기적인 송씨에게 걸린 여종들> 중에서

사노비들은 공식적 의무 외에도 이러저러한 자질구레한 의무까지 함께 부담해야 했다. 공노비의 의무는 법전에라도 규정되었지만 사노비의 의무는 당사자 간에 정해졌으니 사노비의 부담이 훨씬 더 무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_ 81쪽, <남대문 밖에 사는 정광필의 노비> 중에서

노비의 몸값에 관한 《경국대전》 〈형전〉의 규정은 이렇다. “나이 열여섯 살 이상 쉰 살 이하면 가격이 저화 4,000장이고, 열다섯 살 이하이거나 쉰한 살 이상이면 저화 3,000장이다.” 막심이는 쉰여덟 살이었다. 따라서 막심이의 몸값은 저화 3,000장이다. 막동이는 열일곱 살이라 했으니 몸값은 저화 4,000장이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형전〉의 규정에 따라 7,000장에 일괄 매매되었던 것이다. _ 123쪽, <노비 막심이 가족의 매매 현장> 중에서

《대명률직해》 〈투구〉에 따르면, 노비가 주인을 폭행하면 목을 베는 참형에 처했다. 주인을 살해하면 사지를 찢는 능지처참형에 처했다. 고의 없이 과실치사로 주인을 죽이면 교수형에 처했다. 한편 고의로 상해를 가한 경우에는 곤장 100대를 쳐서 유배형에 처했다. 이뿐이 아니었다. 주인의 집안 어른들에게 폭행·상해·살인을 가해도 웬만하면 사형에 처했다. (중략) 《대명률직해》 권21에 의하면, 노비가 주인을 꾸짖거나 욕한 경우에는 교수형에 처했다. _ 167쪽, <술주정하다 맞아 죽은 이서구의 노비>

부자가 된 노비들 중 일부는 축적한 재산으로 토지나 가옥 등을 매입했다. 이렇게 축적한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었다. 소수의 노비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노비가 노비를 소유한 경우도 있었다. 장흥고 노비가 당대 최고의 기생을 유혹할 수 있는 재산을 모은 것은, 이처럼 노비의 재산 보유를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_ 198쪽, <한성 최고 기생을 차지한 공노비>

그렇게 일은 점점 커지고 의심이 많았던 태종은 소격전에 가서 초제(하늘의 별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고 나서 그의 행동을 보았다. 태종의 속내를 모르는 조대림은 몸이 부정해서 초제를 사양하고, 태종은 그를 의심하게 되었다. 목인해는 물정을 잘 아는 선비를 물색하여 의논하라고 충고했더니 조대림은 조용이라는 사람을 불러 도움을 청하라고 했다.

조용은 임금에게 아뢰는 것이 순서라고 충고했지만 목인해가 사람을 시켜 그를 붙잡아두게 하고 다시 이숙번의 집으로 달려가 역모의 주모자가 조용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용은 탈출하여 태종에게 조대림의 일을 말했더니, 태종은 알고 있다면서 걱정 말라고 했다.

그날 저녁 조대림이 입궐하여 태종을 뵙고 경복궁 북쪽에 도적이 있어 마병을 내줄 것을 청했더니 태종은 그가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청을 응낙한 후 입번 총제 연사종에게 밀지를 내리고, 이숙번을 불러 조대림이 출발하면 조천화를 터뜨리라고 했고 자신은 주라를 불어 응하겠다고 했다.

태종이 주라를 불기로 한 것은 조대림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가늠하기 위한 조치였다. 왕이 주라를 분다는 것은 궁궐에 변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니, 조대림이 반역을 도모하는 것이 맞다면 주라 소리를 듣고도 대궐로 오지 않고 자신의 목적지로 달려갈 것이라고 태종은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만약 조대림이 소리를 듣고 온다면 그에게는 반역의 의사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는 셈이었다. 조대림은 소리를 듣고 왔다. 목인해가 누차에 걸쳐 가지 말라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태도를 분명히 한 조대림이 궁궐문에 이르자, 이미 갑병들이 길을 막고 조대림이 말에서 내려 궐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다급해진 목인해는 먼저 대궐로 들어가 평양군(조대림)이 갑옷을 입고 군사를 동원해 대궐로 향한다는 소리를 쳤다.

그 소리에 태종은 총제 권희달을 시켜 조대림을 체포해 순금사에 하옥시켜 국문하게 했지만 역모를 인정하지 않았다. 조용을 잡아와 신문하고, 조대림에게 곤장 20대를 때려도 승복하지 않고 다시 곤장 64대를 때려도 반발하자 자신은 목인해의 꾐에 빠져 도적을 잡으려 했을 뿐이고, 다른 마음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순금사에서 태종에게 이 사실을 전하자, 태종은 황희를 보내 목인해를 신문하게 하여 목인해는 곤장 10여대를 맞고 사실을 자복했고, 조대림과 조용은 무죄로 방면되었다. 조대림은 비로소 목인해의 흉계를 깨닫고 "어제 전하께서 주라를 분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구나!"라고 말했다. 결국 목인해는 능지처참 형이 떨어지고 사건이 여기서 종결되는 것 같았다.

형이 집행되기 전에 대사헌 맹사성과 대간들이 사건의 주범과 중범을 가려야 한다고 주청하여 파란이 다시 일어났다. 그러나 태종은 조대림이 범행에 가담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 그들을 모두 하옥해 극형을 내리게 했다. 다행이 여러 대신들의 간청으로 그들은 능지처참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살았지만, 왕실을 능멸했다는 조목으로 곤장 백 대를 맞고 수년간 유배를 당했다. 비록 이 사건은 출세욕에 눈이 먼 간악한 인물이 꾸민 해프닝에 불과하지만 조정과 왕실과 군부까지 뒤흔들어놓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는 왕실의 인척이라면 능력과 상관없이 요직에 앉혔던 조선 초기 인사 정책의 맹점을 한눈에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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